고려 시대에는 세곡을 어떻게 개경까지 운반했을까 누가 공민왕을 죽였을까
- 최초 등록일
- 2008.03.28
- 최종 저작일
- 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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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시대에는 세곡을 어떻게 개경까지 운반했을까 누가 공민왕을 죽였을까
목차
-고려 시대에는 세곡을 어떻게 개경까지 운반했을까
조창과 조운을 통해 본 고려 시대의 물류시스템
-누가 공민왕을 죽였을까
치밀하게 계획된 공민왕 살해사건
본문내용
․ 세곡의 집결지, 조창
우리나라의 세곡은 연해안 또는 수로·연변의 적당한 장소에 보관되었다가 선박 편으로 개경까지 운송되었는데, 이를 조운이라 하며, 이 일을 담당하는 기관이 조창이다. 원래 조창은 세곡의 수송을 위해 해로와 수로 연변에 설치된 창고이지만, 세곡의 보관뿐만 아니라 부근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수송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기도 했다. 수납한 세곡은 조운 때까지 일정기간 조창에 보관되었다가 해안이나 강변에 있는 포浦로 운반되었다. 세곡의 운성을 위해 각 조창에는 조선이라고 하는 조세 운반선이 비치되어 있었으며, 선박으로 1년에 4번 정도를 운반해야 국가 재정이 유지될 수 있었다.
․ 고려 시대의 조운 항로
각 조창에서 출발한 선박은 정해진 항로로 운행했을 것이다. 주로 육지와 가까운 연안을 이용했겠지만, 고려 때의 해안 항로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당시로써는 운반을 위해 농번기를 피해야 했고, 기후의 변화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조운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뱃길을 개척하는 것은 조운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였는데, 그 대책의 하나가 바로 운하굴착이었다. 지형조건이 나빠 계속해서 실패했던 굴착은 조선시대까지도 그 노력이 이어졌다.
․ 내륙 수로의 발달
조세 운반은 대부분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내륙지방의 조세는 한강수로를 이용해 운반되었다. 내륙수로를 이용한 조창은 충주의 덕흥창과 원주의 흥원창이었다. 한강의 수로는 내륙지방 사람이 서울로 통하는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길이었는데 두개의 조창은 이러한 한강의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