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유래, 관광지
- 최초 등록일
- 2008.03.25
- 최종 저작일
- 2007.10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1. 강화도의 유래 및 역사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쇄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라 불리웠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군으로 불리웠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 2의 서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목차
1. 강화도의 유래 및 역사
2. 강화도의 위치
3. 강화도 교통편
4. 강화도의 명승지
본문내용
1. 강화도의 유래 및 역사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쇄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라 불리웠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군으로 불리웠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 2의 서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써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는 39년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그 후에도 수차의 천도가 있었던 바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그 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 세력인 몽고군이 송경, 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그 다음 대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전후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서울이었다. 그 뒤 25대 충렬왕은 재위 17년 12월에 또다시 거란군의 화를 입어 강화에 들어 왔다가 2년 후에야 겨우 송도로 환도하는 등, 강화는 양차에 걸쳐 고려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고려는 고종때의 천도를 계기로 당시의 서울인 송도를 폐하고, 강화를 항구적인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고려 제23대 고종은 그해 8월(음 6월)에 송도에서 강화로 옮기면서 이령군으로 하여금 국도의 방어선인 내성의 축조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궁전 구장과 사찰, 사직 등을 모두 당시의 왕도인 송도를 모방케 하고, 궁전 배후의 산에 송악이라는 산 이름까지 짓게 했던 것이다. 내성이 완공되자 익년 겨울에 외성을 쌓게 했고, 22년 9월에는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24년 12월에는 외성 등을 또 중수했다. 그러나 몽고병의 세력이 날로 강화되어 강화도의 임시 왕도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마니산 남쪽에 별궁인 흥왕이궁을 마련했고, 5월에는 가궁과 혈구사를 삼랑성에 창설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끝내 강화는 몽고군에게 유린 되었고, 태자는 볼모가 되어 46년 6월에 몽고 내지로 납치되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자를 몽고로 보낸채 고종은 강화에서 천명을 다했고, 뒤를 이은 24대 원종도 강화를 서울로 이어받을 생각이었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이를 실현치 못하였다. 이로써 강화는 천도이후 39년간 고려의 국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강화서울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 25대 충렬왕 10년에는 원나라의 반적, 흡단의 내구로 충렬왕이 일시 강화로 피했던 일이 있고, 고려 말의 공민왕 10년에는 또 홍두적의 난을 당해
참고 자료
강화군청 홈페이지 http://www.ganghwa.incheon.kr/pub/index.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