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화
- 최초 등록일
- 2008.02.27
- 최종 저작일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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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대별로 한국의 영화의 특징을 정리 했습니다.
목차
[개척기]
[발성영화기]
[8·15해방 직후]
[6·25전쟁 이후]
[중흥기]
[전성기]
[1970년대 이후]
본문내용
[개척기]
영화가 한국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1919년이다. 이것은 한국에 ‘활동사진’으로 불린 영화가 소개된 지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었던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투>는 연극 장면 가운데 필요한 대목을 영사 화면으로 만들어 공연 중에 비추는 활동사진을 영사 화면으로 만들어 공연 중에 비추는 활동사진 연쇄극이었다. 연쇄극은 한국 영화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적 형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 영화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뒤 늑막염으로 죽은 김도산의 일파가 1923년 1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사진의 틀을 갖춘 활극<국경>을 만들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출연진은 박일순을 비롯한 신극좌 배우 20여 명으로 5만원이라는 거액의 제작비가 들었다. 지금까지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알려져 있는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는 <국경>이 상영된 그해 4월 9일 경성 호텔에서 신문통신기자를 비롯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이 계몽극에는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등장 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는 귀재 나운규의 출연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26년 박승필이 주도한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일제하의 민중들에게 조국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 민족영화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의 탁월한 영화적 재능은 제작·각본·감독·주연을 겸한 <사랑을 찾아서>(1928년)·<벙어리 삼룡>(1929년) 등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