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의 정의
- 최초 등록일
- 2008.02.08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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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말, 일본의 정한론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글입니다.
목차
정한론의 정의
정한론의 배경과 목적
정한론의 내용
본문내용
정한론의 정의
1871년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된 정한론은 말 그대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주장이다. 넓게 보면 실전을 통해 축적된 전투기술과 넘치는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대외침략을 기도하였던 16세기 임진왜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런데 조선은 정벌하는데, 왜 정조론(征朝論)이 아니고, 정한론(征韓論) 일까? 정조론은 일본어로 세이초론이라 하는데, 이는 초센을 정벌한다는 의미도 되지만, 초테이(천황이 있는 곳)를 정벌한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천황을 신으로 떠받들기 시작한 상황에서, 대단히 불경스러운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을 뜻하는 말을 찾기 위해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조 대신에 한을 삽입하게 된 것 이었다.
정한론의 배경과 목적
정한론의 배경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일본의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사설학당을 열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와 다카스기 신사쿠와 같은 인물을 배출해 낸 사람으로, 난학과 서양학, 병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1854년 페리함대의 내항을 계기로 양이사상을 버리고, 외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한 뒤에, ‘유수록’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무력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감차카, 류큐, 조선을 공략해 예전의 영광을 다시 구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20여년 뒤에 본격적으로 거론된 정한론과 더 나아가, 대륙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동아공영권 사상의 원조가 된 것이었다. 이 후에도 정한론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에 의해서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971년 11월 미국과의 불평등한 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예비교섭과 구미와 유럽 선진제국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이와쿠라 사절단이 요코하마를 출발하고 나서, 그들이 돌아오는 1873년까지 유수정부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위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유럽제국주의로부터 당하던, 경제적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메이지유신으로 특권을 박탈당하고,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 계급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정한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