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8.02.04
- 최종 저작일
-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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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19혁명의 자세한 전개 과정
목차
▶1956년의 대통령 선거
▶폭력정치
▶3.15 부정선거
▶김주열
▶4.19
▶정의의 승리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1956년의 대통령 선거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의 지지도는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 이는 경제적 요인, 그리고 국민들의 불신이 맞물려서 발생한 현상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국회 간선제로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52년 7월 4일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였다. 그리고 1954년 11월 28일에는 대통령 연임제로 개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6년의 대통령 선거는 당연히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게는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거듭되는 우격다짐식의 개헌으로 국민의 지지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해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선출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국민의 지지도를 시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 하였다.
“대통령을 두 번 지냈고, 또 나이가 80이라도 일할 힘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젊은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자 나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
이 성명은 이승만의 의도와는 달리 국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국민들은 그래도 이승만이 양심은 있구나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황한 자유당은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민의(民意)’를 억지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데모를 벌이고 ‘이승만 대통령 다시 출마’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승만은 이 엉터리 민의에 크게 감동하여 ‘민의’에 따라 다시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 장면을 부통령 후보에 내세웠다. 이 당시 민주당의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 보자!”였다. 국민들은 이미 부패한 자유당 정권보다는 야당을 지지했다. 이에 자유당은 “구관이 명관이다. 갈아 봤자 별 수 없다.”라면서 대응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56년 5월 4일 신익희의 한강 연설에는 무려 3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이승만 독재 정치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날 새벽 호남지방으로 선거 연설을 떠나던 신익희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사망한 상태에서도 대통령 선거는 진행되었고 결국 다시 이승만이 대통령에 뽑히고 말았다. 그리고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