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김산의 일제하 투쟁 노선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8.01.26
- 최종 저작일
- 2007.11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김구, 김산의 일제하 투쟁 노선을 비교한 글입니다.
백범일지[김구]와 아리랑[김산]을 읽은 감상문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김구는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있다. 그는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민족 통합과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투신했으며 윤봉길, 이봉창등의 의거 뒤에도 김구가 있었다. 이처럼 김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써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김산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않다. 김산은 주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공산주의적 성향을 띄며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이론보다는 실행을 중요시하는 약간 과격성향의 독립운동가였으며 그의 활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당원들에 의해 모함되어 중국 공산당에서 일제의 첩자이자 트로츠키 주의자라는 이유로 처형당했지만 이것이 부당했음을 밝히고 당적을 복권 시켜주었다.
김구와 김산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김산은 11살에 가출하여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였으며 그로 인해 평생 아버지와는 불편한 관계로 지냈지만 둘째 형의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다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거기서 평생 동료인 김충창을 만나 레닌-마르크스 주의를 사사받고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김구는 어린 시절 역모사건으로 멸문지화 위기에 있는 집안 때문에 상놈인척 하면서 숨어지낼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지주들의 수탈이 심했던 사회 사정상 양반에 대한 적개심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초기 백범의 사상 중에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집념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였다. 김구는 과거낙방을 계기로 동학에 입문하여 투쟁하였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다 주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인 일본 공사 미우라의 일당이라 판단,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재판장에서 당당히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한것이라 밝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결국 고종의 재가로 사형집행은 면하였다. 이처럼 김구와 김산은 일제의 침투와 불안한 사회상황 속에서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으로 자신의 갈 길을 정했다는 점이 매우 비슷하다.
참고 자료
백범일지(김구)
아리랑(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