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지 필화사건 - 예술표현의 자유 vs. 체제적 입장
- 최초 등록일
- 2008.01.14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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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어문학 - 국어국문학. 예술표현의 자유와 체제적 제약에 따른 필화사건에 대한 리포트
목차
◎ 들어가며
1. 시대상황과 사건 전개
2. <분지> 필화사건과 그 논쟁
3. <분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 예술표현의 자유 vs. 체제적 입장
1) <분지> 사건의 양면성 - 표현의 자유 논쟁과 자유의 제한
2) <분지> 논쟁의 한계성 - <분지> 작품에 대한 문학적 비평의 부족
3) <분지> 논쟁 中 검사 측 주장의 한계성 - 반미인가, 용공인가
4. <분지>를 통한 해석
1) <분지>를 통해 본 미국의 실체
2) <분지>를 통해 본 민족 현실
3) <분지>를 통해 본 민족 내부에 대한 비판적 인식
5. <분지> 필화사건의 의미
◎ 나가며
본문내용
<분지>필화 사건이 일어난 1965년은 박정희정권이 들어선 이후 가장 세찬 바람이 불어친 해라고 할 수 있다. 한일협정을 둘러싼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월남 파병, 군 내부의 반정부 쿠데타음모, 박 대통령의 방미, 여러 대학과 고등학교의 조기방학, 위수령 발동, 공화당 내의 항명파동 등 실로 정권 차원을 넘어서 국가의 운명이 걸려있는 큰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특히 이 해 2월 17일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의 시이나 외상이 일장기를 휘날리며 서울로 들어와 한일 기본 조약을 가조인(2월 20일)하면서 전 국민적인 반대운동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각 정당,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지식인, 학생, 시민들까지 궐기대회, 데모, 성명, 농성 등 온갖 방법으로 한일협정 체결을 반대하고 나섰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상당수의 학자, 문인 등 지식인들은 반정부적 저항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험악하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남정현의 <분지> 필화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가 정식으로 구속된 것은 그 해 7월 7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보다 훨씬 전인 5월 초순부터 이미 그는 을지로 3가에 있는 ‘충일기업사’라는 곳에 연행되어 당국의 조사를 받아오고 있었다.
이 때, 1965년 3월호 『현대문학』지에 실린 남정현의 소설 <糞地>가 용공적이라는 이유로 문제가 되었는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 이 작품이 그 해 5월 8일자 북한의 『통일전선』이라는 기관지에 전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이 문제는 형사문제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남정현은 처음에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았는데 이 무렵에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고조되고 있었고 마침내 재경 문학인 82명의 이름으로 한일협정의 부당성을 공격하는 선언문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이런 시점에서 중앙정보부가 1965년 7월 9일 남정현을 반공법위반으로 구속하고 7월 14일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사건을 송치시킨 다음 그 달 23일 구속적부심사 끝에 남씨를 석방하였다. 그 후 1년 뒤인 1966년 7월 23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 남정현이 불구속 기소되었 는데 그에 대한 적용법조는 반공법 제 4조 제1항으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의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및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참고 자료
1. 한승헌, <남정현의 필화, 「분지」사건>,『문예중앙』 1985년 봄호.
2. 한승헌, <필화사건과 문학>, 월간『다리』 1972년 8호.
3. 『남정현대표작품선』, 한겨레, 1987.
4.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