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호남의병
- 최초 등록일
- 2008.01.14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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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말의 호남의병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호남의병에 대해서는 제 레포트만 보면 모든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목차
한말의 호남의병
1.역사 속의 호남
2.호남의병의 창의
2-1 노사 기정진의 학문사상
2-2 나주의병의 봉기의 배경
2-3 나주의병의 봉기
2-4 나주지역의 의병활동의 세부 상황
2-5 전 의정부찬정 최익현
2-6 태인의병의 창의와 활동, 그 한계
3.동학농민운동
4.호남의병의 조망 이후
본문내용
◎역사 속의 호남(湖南)
일전에, 한 영화의 홍보 포스터 한 장이 논란거리로 부각되어 꽤나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포스터에 적혀있는 다음의 문구 때문이었다. ‘전라도 새끼가 깡패밖에 할 게 더 있냐?’사용된 어투나 단어 자체가 호전적이거니와, 한술 더 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효과가 있으리라는 지적이 있었다. 예의 포스터 자체를 사용할 수 없게 해야 한다는 호남인들의 반발이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각도를 약간만 달리해 볼 때, 사실 이 사건은 하나의 반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약자라는 말에 발끈하는 것은 약자라 했던가. 왜 호남인들은 예의 문구를 그토록 성토하는가. 비약질 수도 있겠으니, 사실 호남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 해석이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에 얽힌 우리의 시선에 왜곡됨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정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그렇다면, 대체 역사 속의 호남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예로부터 호남지역이 곡창의 지대였음이야 주지의 사실이다. 농업 생산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하다는 의미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농업생산력이 높던 호남지역 농민들의 삶의 질은 높지 못했다. 짐작하기 쉬운 이유로, 집중적 수탈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문화유적답사 강의를 통해, 최원규 교수님은 심지어 그 수탈의 도가 지나칠 때는 수확량의 9/10가 조세의 명목으로 징수되기도 했다고 말씀하셨다.
상황이 그러했던 만큼 지배층에 대한 호남민중들의 반발감은 드높았으며, 그것이 항거로 표출된 예는 적지 않았다. 이것이 물론 본 기사에서 다루게 될 호남의병과는 맥을 달리 하는 이야기이나, 2007학년도 xx대학교 사학과 정기답사의 테마들과 관련하여서는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을 들 수 있겠다. 1892년 부임한 고부군수 조병갑은 학정을 일삼는 탐관오리였으며, 급기야는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축조한 만석보(萬石洑)의 수세를 과중하게 징수하는 일을 감행했다.
참고 자료
최익현, 『면암집』권3, p.170
이정진, 「임술의책」, 『기정진전집』권4, p.304
이현희, 『독립운동사』, 청아, 1994, p.41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