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광화사 소설 분석
- 최초 등록일
- 2008.01.11
- 최종 저작일
- 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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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학교 현대 소설 강의 시간에 쓴 레포트입니다.
참고하세요 ^ㅇ ^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소설 속의 미(美)의 기준
2. 여(汝)의 역화
3. 소경 처음 죽음의 의미
4. 허구의 공간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김동인은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동경 유학 시절 주요한, 전영택, 김환 등과 문학동인지 《창조》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창조》의 창간호에 발표한 작품은 『약한자의 슬픔』이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이 작품 이후 그는 『배따라기』(1921), 『감자』(1925), 『명문(明文)』, 『광염(狂炎) 소나타』(1923)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드러냈었으며, 1930년대에는 단편소설『붉은 산』(1932),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과 함께 『젊은 그들』(1931), 『운현궁의 봄』(1934), 『대수양』(1941)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의 평론 『조선근대소설고』(1929), 『춘원연구』(1938)는 한국 근대 비평의 확립 과정에서 본격적인 비평 작업의 성과로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김동인이 처음부터 문학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김동인이 일본으로 유학을 간 까닭은 부친의 뜻에 따라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원을 거쳐 1917년에 명도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러나 부친 사망, 결혼 등의 급격한 신상 변화 속에서 그는 1918년 천단미술학원에 입학했다가 1919년 미술학교를 중퇴하고 《창조》를 발간하면서 완전히 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버렸다. 그가 문학으로 뛰어든 데 대해서 몇 가지 이유가 알려져 있다.
김동인이 미술학교에 입학했던 사실이 하마터면 그의 생애는 물론 한국 근대 문학사와 한국 근대 미술사에 까지 전혀 색다른 기록을 남길 뻔 했던 중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술학교에 입학했던 동기라든가 또한 1년 만에 미술 공부를 포기했던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문학 활동을 시작하면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기치를 내걸고 문학의 최고 가치를 미(美)로 주창한 사실로 미루어 전부터 미술을 하려는 욕구와 미술에 대한 깊은 관심이나 이해, 또는 어느 정도의 소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