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정조
- 최초 등록일
- 2008.01.05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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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조의 성장과정 속에 화성행궁이 생기게 된 근본적인 배경,
화성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화성행궁은 어떤 곳인지,
화성행궁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등이 있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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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화성행궁을 돌아보기 전에 정조가 왜 화성행궁을 짓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아들로서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 1736년 두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9세 때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749년 15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맡았는데 신임환국 문제에 대하여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즉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장희빈 소생인 경종이 소론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은 34세가 되도록 후사가 없고 신병까지 있었으므로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은 하루 빨리 후계자를 선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봉휘 등 소론은 이에 반대했으나, 결국 노론세력의 주장이 관철되어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노론들의 건의에 따라 세제가 경종을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맡게 되자, 이에 반발한 조태억, 이광좌, 유봉휘 등 소론세력의 반대로 대처의 결정이 철회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어 소론의 김일경 등이 노론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발, 노론 일파를 실각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은 신축 ․ 임인 양년에 옥사가 일어났다고 하여 흔히 ‘신임사화’라고 불린다. 그런데 경종의 승하로 세제인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세는 역전되어 소론이 실각하고 한 때 노론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후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신임사화를 둘러싼 시비로 당쟁은 좀처럼 그칠 날이 없었다. 즉, 소론과 남인 세력은 노론을 경종에 대한 역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노론세력은 소론을 영조에 대한 역적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런데 첨예한 문제를 갖고 있는 신임사화에 대하여 사도세자는 경종을 동정하고 소론을 실각시킨 노론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에 노론들은 크게 당황했고 사도세자가 노론의 옹립으로 등극한 부왕인 영조에게 미움을 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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