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 최초 등록일
- 2007.12.21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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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기의 구성과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동기를 설명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사기의 구성과 의미
2. 논찬의 성립
3. 사마천의 자화상
4. 사마천에게 있어서 역사와 인간
본문내용
1. <史記>의 구성과 그 의미
<사기>는 본기(本紀) 12편, 서(書) 8편, 표(表) 10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의 다섯 부문으로 되어 있다. 본기는 제왕의 행적의 연대기적 기술이고, 서는 특정한 사회현상의 개별적 기술이며, 표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시간적 유일성과 연계성을 주로한 연표이고, 세가는 정치질서에 있어 제왕의 다음가는 위치에 있는 제후왕의 행적을, 그리고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둘러싸고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개인의 생활의 기록이다.
여기에서 본기의 ‘기(紀)’는 기록한다는 뜻의 ‘기(記)’와 뜻이 같고 “사실에 근거(本)하여 그것을 기록한다”는 뜻에서 ‘본기’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이 있다. 즉 사실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의 본기를 보면 「항우본기(項羽本紀)」와 「여후본기(呂后本紀)」의 둘을 제외한 다른 본기는 모두 공인된 제왕의 역사이다. 그리하여 기(紀)는 이(理)의 뜻으로 서 후세를 위한 중요한 다스림의 법도를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설도 있다. 혹자는 이 관점을 더 강화하여 ‘본’이란 그 본계(本系)를 얽어 연결하는 것이고 기(紀)는 다스린다(理)는 뜻으로서 많은 일을 거느려 다스린다고 보기도 한다. 즉 본계를 얽어엮어 세계를 통치한다는 뜻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예 간단하게 ‘제왕의 역사’라고 해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 같으나 「항우본기」나 「여후본기」처럼 이단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항우나 여후의 경우 모두 제왕은 아니었으나 실질적으로 제왕의 역할을 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사기>에서 ‘본기’라 할 경우 반드시 제왕의 역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사람을 정권담당자로 보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질적인 것을 더 중시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진의 시황제가 죽은 뒤 진승(陳勝)이나 오광(吳廣)이 왕이 되어 장초(張楚)라는 국호를 내걸고, 일시적이기는 하나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던 때가 있었지만 <사기>에서는 진승의 기록을 ‘세가’에 포함시켜 여러 제후와 마찬가지로밖에 취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진승과 항우, 여후의 차이는 중심자가 되어 거기에서 나오는 호령이 정치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실력자인가 아닌가가 될 것이다. 진승은 국호를 내걸었지만 그러한 중심자는 아니었다. 사마천이 보기에 ‘본기’에 기록될 자는 그 같은 조건에 맞는 자라야 했다. 말하자면 세계의 중심자라는 의식이 그것이다. 이 의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