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신라 냉수리비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7.12.19
- 최종 저작일
- 2007.10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영일 신라 냉수리비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개관
2. 비문의 구성 및 해석
3. 비(碑)의 성격
1) 냉수리비에 보이는 신라 6부(部)
2) 5-6세기 국가의 지방통치
3) 재(財)의 성격
4. 맺음말
본문내용
1. 개관
영일 냉수리 신라비는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신라 최고(最古)의 비로써, 1989년 3월에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2리에서 마을주민이 밭갈이 도중 발견한 신라고비이다. 후에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신광면 면사무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석에 특이하게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에 글씨를 새긴 3면비이다. 비석은 폭이 70cm, 높이가 60cm, 두께가 30cm이다. 글자는 앞면에 12행 152자, 뒷면에 7행 59자, 윗면에 5행 20자를 새겼다. 모든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며, 해서(楷書)체로 쓰여 있다. 비문의 내용은 503년 무렵에 진이마촌에 사는 절거리와 말추, 사신지 등이 어떤 재물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자,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을 비롯한 7명의 왕들이 전세(前世) 2왕의 교시를 증거로 하여 진이마촌의 어떤 재물을 절거리의 소유라고 결정하였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비는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먼저 지증왕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들 수 있고, 아울러 소지마립간이 500년에 사망하고 지증이 왕위에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문왕을 칭하고 있는 사실도 새로이 알려진 내용이다. 또한 국왕뿐만 아니라 화백회의에 참석하는 모든 구성원들을 왕이라고 불렀던 사실도 비에서 전하고 있다.
2. 비문의 구성 및 해석
비문은 크게 네 단락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지도로갈문왕을 비롯한 일곱 왕들이 전세의 사부지왕과 내지왕의 교시를 증거로 진이마촌의 어떤 재물을 절거리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교시한 부분이다. 두 번째는 일곱 왕들이 별도로 교시를 내려 절거리가 죽으면 그 재물은 그 댁 아이인 사노가 가지며, 말추와 사신지 두 사람은 재물에 대하여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말라고 천명한 부분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이상 일곱 왕들이 합의한 내용을 비에 새기고 그것을 건립한 사람들을 적었으며, 네 번째 단락은 거기에 관여한 진이마촌 현지인들을 표기한 부분이다.
참고 자료
※ 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4.
김영만,「영일 냉수리 신라 비문의 문장분석 시고-이두적 요소는 얼마나 되는가-」『구결연구 18』, 구결학회, 2007.
박향미,「영일냉수리비를 통해 본 5-6세기 신라의 재산상속」『경북사학 17』, 경북사학회, 1995.
신종원,「6세기 초 신라의 희생례-영일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비의 비문을 중심으로」『진단학보 70』, 진단학회, 1990.
이우태,「영일 냉수리비의 재검토-재의 성격을 중심으로」『신라문화 9』,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2.
주보돈,「영일 냉수리비에 대한 기초적 검토」『신라문화 6』,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89.
최광식,「영일 냉수리 신라비의 석문과 내용분석」『신라문화제 학술발표회 논문집 11』,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0.
※ 참고 사이트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gsm.nricp.go.kr)
전국문화유적총람 (all.nricp.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