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대두와 발전
- 최초 등록일
- 2007.12.10
- 최종 저작일
- 2007.12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
소개글
17C 실학이 어떻게 형성하였으며
18C 실학이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두 방향으로 발전한 것에대해
서술하였습니다.
본문 중간중간 표를 삽입하여 이해를 쉽게 하였습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실학의 대두
Ⅲ. 실학의 발전
1. 중농학파(경세치용학파)
① 유형원
② 이익
③ 정약용
2. 중상주의학파(이용후생학파/북학파)
① 유수원
② 홍대용
③ 박지원
④ 박제가
Ⅳ. 맺음말
본문내용
‘실학’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뜻하는 유일한 개념은 아니었다. 실학 이전에 도학파의 전통 속에서도 도학의 학풍을 ‘실학’이라 일컬었던 사실이 있다. 따라서 ‘실학’이라는 말은 본래 조선 후기의 실학에만 쓰였던 특정학문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진실성을 지닌 학문이라는 보통명사의 성격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20년대 일제 치하에서 우리의 국학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면서 우리의 역사·지리·언어·풍속 등을 깊은 관심으로 연구해 왔던 조선 후기의 학풍을 부각시키면서 ‘실학’으로 명명하였다. 이때부터 ‘실학’이 조선후기 새로운 유학의 흐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실학은 17~18세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사회 모순에 직면하여 그 해결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대두한 학문과 사회 개혁론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이 어떻게 대두되었고 어떠한 경향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실학의 대두
이황과 이이의 출현으로 절정에 올라있던 조선성리학은 조선을 뛰어난 인문국가·도덕국가로 만들었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성리학 자체가 본연의 건강성을 상실하고 과거준비를 위한 도구학문으로 변질되어 국내외로부터 불어 닥친 위기를 관리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과 질병, 수취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농민층의 동요, 지나친 붕당간의 갈등, 대외교역에 따른 상인층의 성장 그리고 명으로부터 들어온 양명학 등이 지식인층 사이에 성리학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새로운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성리학 자체를 도구학문에서 개혁지향적이고 진실한 학문으로 바꾸고, 아울러 전문기술학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싹텄다.
가장 민감한 변화는 문학에서 먼저 나타나 왜란 이전에 당시(唐詩)와 고문사(古文辭)의 유행을 가져왔다. 또한 성리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기인들도 나타났다. 명종·선조 때의 임제는 문학을 통해서, 이지함은 직접 상업 활동에 뛰어들면서 기행으로 성리학을 거부하고 나섰다.
참고 자료
금장태, 한국유학의 탐구, 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朱七星, 한국 실학과 동아시아 실학 비교, 파주 : 한국학술정보(주), 2005.
한국사상사연구회, 실학의 철학, 서울 : 예문서원, 1996.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 파주 : 경세원, 2005.
현상윤, 풀어 옮긴 조선 유학사, 서울 : 현음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