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의 성립과 발전
- 최초 등록일
- 2007.12.06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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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조의 성립과 발전에 관한 글입니다 .
목차
청조정권(淸朝政權)의 성립(成立)과 발전(發展)
Ⅰ.머리말
Ⅱ.제 1 장 후금의 건국과 발전-입관(入關前史)
1) 여진족의 발전과 누르하치
2) 팔기 제도와 문자의 창제
3) 후금의 건국과 발전
Ⅲ. 청조통치원의 확립
1) 대청(大靑)으로의 발전과 중국 내지 정복
본문내용
Ⅰ.머리말
아편전쟁 이전까지의 청조(淸朝史)는 명말(明末)에 발흥하여 후금(後金)을 건설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대청(大靑)으로 발전하게 되는 이른바 입관전사(入關前史)와 명조(明朝)가 멸망한 이후 북경(北京)에 진주하여 중국을 통치한 시기인 입관(入關)후의 청조로 구분된다. 이 두시기는 국가권력의 형태라든가 정치집단의 성격, 사회조직 등 여러 면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연구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Ⅱ.제 1 장 후금의 건국과 발전-입관(入關前史)
1) 여진족의 발전과 누르하치
명이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 북쪽에는 아직 원의 잔여 세력이 있었다. 때문에 홍무제는 자신의 아들들을 번왕(藩王)으로 분봉(分封)하여 그중 3명을 요동으로 파견함으로써 요양(遼陽)에 요동도사(遼東都司), 대녕(大寧)에 대녕도사(大寧都司), 노아간(奴兒干)에 노아간 도사를 설치하여 동북 각 지역의 위소(衛所)를 분할 통치하였다. 이후 대녕도사가 내지로 이동함에 따라서 동북지방은 요동도사와 노아간도사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다. 청조는 이 노아간도사 휘하의 여진계통의 한 집단에서 성장하여 성립된 것이다. 노아간도사 휘하의 여진족은 야인(野人)ㆍ해서(海西)ㆍ건주(建奏)란 3대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점차 명대를 통해 남으로 이동하여 16세기에는 송화강유역으로부터 요하의 지류인 혼하(渾河)유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16세기말에는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명의 통제가 이완되자 독립의 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남쪽에 거주하고 있던 것은 건주부였는데 그 일부부족중에서 누르하치가 나타났다. 누르하치는 건주좌위도독이었던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의 후손으로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였다. 애신은 만주어로 금(金)이란 뜻이며 각라란 족(族)의 의미이다. 따라서 애신각라란 금조의 유족이란 뜻으로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 하나인 금의 후예라는 뜻이다. 당시 건주부에는 5개의 부족으로 철진(哲陣)부,훈하부, 소극소호하(蘇克蘇滸河)부, 동악(董顎)부, 완안(完顔)부가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