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황조
- 최초 등록일
- 2007.11.26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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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과거 중국에 세 자매가 있었다. 한 사람은 돈을 사랑했고, 한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고, 한 사람은 권력을 사랑했다.”
영화 ‘송가황조’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다. 돈을 사랑한 사람은 첫째딸 쑹아이링(宋愛齡), 나라를 사랑한 사람은 둘째딸 쑹칭링, 권력을 사랑한 사람은 셋째딸 쑹메이링이다. 큰딸은 갑부이자 공자의 후손인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해 돈을 움켜쥐었다. 둘째딸 쑹칭링은 쑨원과 결혼해 쑨원의 이상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한평생 중국 민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셋째딸 쑹메이링은 장제스와 결혼함으로써 중화민국의 퍼스트레이디로 권력과 정치를 제 손 안에 쥐고 흔들었다. ‘그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중국을 통치했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장제스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배후세력이 바로 쑹메이링이었다. 송씨 집안의 세 딸이 중국 근대 역사를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차
돈, 나라, 권력을 사랑한 세 자매
큰 세상을 보게 하라
26년 나이 차 극복한 결혼
과도기의 이중결혼
대륙과 타이완으로 갈려 40년
본문내용
26년 나이 차 극복한 결혼
영화에서 세 딸은 자매이지만 성격이 매우 다르게 묘사된다. 실제로도 그랬다. 큰딸 아이링은 계산이 빠르고 현실적이었다. 아이링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쑨원의 비서 노릇을 했다. 그러는 동안 쑨원이 아이링을 좋아했고 청혼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쑨원이 어떻게 생각했건 아이링은 쑨원에게 관심이 없었다. 쑨원은 아이링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었다. 쑨원이 낭만주의자라면 아이링은 현실주의자였다. 쑹아이링이 보기에 쑨원은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적이진 못했다. 결국 아이링은 당대 최고 부자이던 쿵샹시와 결혼한다.
셋째딸 메이링은 활달하고 사교적이고 야무졌다. 영화에서 장제스가 시안에서 붙잡혀 있을 때 시안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협상해 장제스를 구출해낼 때의 모습은 여장부답다. 그후 미국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한 여성으로 기록되고, 명연설로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장제스의 대미 외교는 순전히 쑹메이링 덕분이었다.
둘째딸 칭링은 낭만적이고 순박하고 열정적이며 신념이 강했다. 언니 아이링이 결혼을 해서 쑨원의 곁을 떠나자 칭링은 언니를 대신해 ‘쑨원 아저씨’의 비서를 하겠다고 나선다. 당시 쑨원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쫓겨 일본으로 도망 와 있었다.
1911년 10월10일 중국에서 ‘쌍십절’이라고 부르는 이 날, 신해혁명이 성공해 1912년 1월1일 새해 첫날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쑨원은 임시총통에 취임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특히 베이징을 장악하고 있던 실권자는 위안스카이였다. 서구 열강들도 위안스카이에 힘을 실어줬다. 쑨원은 하는 수 없이 위안스카이가 청 정부를 물러나게 하고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말한다. 쑨원은 위안스카이가 ‘마지막 황제’ 푸이를 폐위시킨 다음날(1912년 2월13일) 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다. 총통으로 취임한 지 43일 만이다.
참고 자료
송가황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