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캠퍼스북
  • 파일시티 이벤트
  • LF몰 이벤트
  • 서울좀비 이벤트
  • 탑툰 이벤트
  • 닥터피엘 이벤트
  • 아이템베이 이벤트
  • 아이템매니아 이벤트

도요타 생산방식과 그 적용된 사례

*병*
개인인증판매자스토어
최초 등록일
2007.11.17
최종 저작일
2007.11
23페이지/한글파일 한컴오피스
가격 2,000원 할인쿠폰받기
다운로드
장바구니

소개글

1. Toyota 소개
(1) 도요타의 역사
도요타자동차공업(주)의 독립
1920년대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하청 공장으로 연간 300~400대가 생산되었을 뿐이었다. 그 후 정부의 국산차 장려정책에 따라 이스즈와 닛산의 전신인 도쿄자동차공업 등이 주식회사로 출범했으며, 1937년 도요타자동차공업(주)이 (주)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로부터 독립하면서 현재 나고야 근처의 고로모에 대형공장을 세우고, 군용트럭 생산에 들어간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2차 대전 패배와 열악한 생산라인으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어 50년 봄에는 도산 위기를 맞았고 여기에 파업사태까지 겹쳐 도요타 기이치로는 사장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주거래 은행은 관리하기 편하도록 도요타자동차를 제작과 판매부분을 떼어 각각 다른 회사로 운영하게 했다.
한국 전쟁과 오일쇼크
도요타를 기사회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었다. 미군은 한국전쟁이 장기화되자 가까운 일본에서 군용트럭을 조달하기로 하고 새로 발족한 경찰예비대와 함께 도요타에 각각 1천대씩의 트럭을 주문하는 등, 한국 전쟁은 도요타가 기업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카롤라라는 모델이 인기를 끌면서 일본 모터리제이션 이끌고,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국시장에서도 오일쇼크 계기로 저연비 차량이 각광 받으면서 도요타 자동차가 새롭게 부상하게 된다. 이때 선보인 자동차로는 55년 크라운, 57년 코로나, 61년 퍼블리카였고, 모두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기반을 잡아갔으며, 이때 선보인 모델들은 오랫동안 모델 체인지를 거치며 도요타의 인기 모델의 역할을 하게 된다.
내수시장의 활성화와 본격적인 미국시장 진출
60년대는 일본 자동차산업에 아주 중요한 전환기로, 도쿄 올림픽이 열린 64년 일본은 연간 50만 대를 넘어 58만 대의 차를 만들었다. 이때 도요타 카롤라와 닛산 서니는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며 일본의 모터리제이션을 이끌었는데, 사람들은 두 차의 머릿자를 따서 SC전쟁으로 불렀다.
도요타를 일본 제일의 메이커 자리에 확실하게 앉힌 카롤라는 그 후 83년 초 생산 1천만 대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포드 T형(1천500만 대), 폴크스바겐 비틀(2천만 대)에 이은 세 번째 1천만 대 돌파모델이었다.
70년대 들어서도 도요타는 모델 수를 계속 늘려갔다. 70년에는 일본의 첫 스페셜티카 셀리카가 나왔고, 셀리카의 형제모델인 카리나로 카롤라와 코로나의 틈새를 메웠다. 도요타는 차종마다 엔진과 스타일을 조금씩 달리해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폈고, 70년 연간 생산 100만 대, 72년 생산누계 1천만 대를 돌파한데 이어 70년대 중반에는 일본 승용차시장의 33%를 점유했다.
또한 세계시장에서도 카롤라는 미국 소형차시장에서 인기를 모았고, 73년 전 세계를 덮친 2차 오일쇼크로 작고 경제적인 차를 찾게 됨에 따라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도요타는 75년 미국시장에 27만8천 대를 팔아 폴크스바겐을 앞지르고 미국내 수입차 판매1위에 올랐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카롤라였다.
최근동향
미국시장에서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도요타는 미국의 누적되는 대일 무역적자로 인한 수입규제의 벽에 부닥친다.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브랜드들은 이에 맞서 81년부터 자율규제를 통해 미국시장을 공략하게 된다. 이시기 도요타는 일본차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88년 미국시장용 디비전 렉서스를 설립, 고급모델은 렉서스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또한 현지화를 가속화시켜 84년부터 캘리포니아의 GM과의 합작 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자동차의 인테리어와 장비를 미국식으로 꾸미는 등 적극적인 세계시장 공략에 나선다.
자동차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퍼스널카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에 발맞춰 도요타는 80년대부터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고 MR2(84년), 셀리카(85년), 소아라(86년) 등의 새 모델을 선보였다. 또 연료분사장치, 안전 브레이크, 특수 서스펜션 등 전자장비도 크게 늘렸다.
90년대 들어서는 내수침체와 엔고로 인한 어려움, 동남아 국가들의 IMF 한파 등의 위기를 맞기도 하나 그때마다 적절한 전략의 수립과 시행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일본 제 1의 자동차기업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의 주요 기업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최근 GM, 포드 등 선진국의 대형업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업 간 합병바람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생산대수 기준으로 1위 GM, 2위 포드에 이어 세계 3위였던 도요타는 98년 폴크스바겐에 3위 자리를 내준 데 이어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최근 미쓰비시와 전략적 제휴를 선언함에 따라 5위 자리로 밀려날 위기에 있다.
그러나 도요타는 양적인 크기만큼이나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며 여기에 '판매의 도요타' 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뛰어난 마케팅이 어우러져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가능성이 높으며, GM, 폴크스바겐 등과 차세대 저공해차 개발을 공동추진하기로 하고 인터넷 부품구매도 공동으로 추진하는 등 협력관계를 강화하면서 독자 생존하는 방법을 택해 '빅5' 자리는 굳건히 다질 것으로 예상된다.

목차

. Toyota 소개
(1) 도요타의 역사
(2) 도요타의 현재
(3) 도요타의 Financial states
(4) 회사현황
(5) 도요타의 경영비전과 원칙
도요타 자동차의 원칙
2. TPS 소개
(1) 정의
(2) 목적
(3) 기초조건
(4) 도요타 생산방식의 간판방식의 전제조건
등등..

본문내용

1. Toyota 소개
(1) 도요타의 역사
도요타자동차공업(주)의 독립
1920년대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하청 공장으로 연간 300~400대가 생산되었을 뿐이었다. 그 후 정부의 국산차 장려정책에 따라 이스즈와 닛산의 전신인 도쿄자동차공업 등이 주식회사로 출범했으며, 1937년 도요타자동차공업(주)이 (주)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로부터 독립하면서 현재 나고야 근처의 고로모에 대형공장을 세우고, 군용트럭 생산에 들어간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2차 대전 패배와 열악한 생산라인으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어 50년 봄에는 도산 위기를 맞았고 여기에 파업사태까지 겹쳐 도요타 기이치로는 사장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주거래 은행은 관리하기 편하도록 도요타자동차를 제작과 판매부분을 떼어 각각 다른 회사로 운영하게 했다.
한국 전쟁과 오일쇼크
도요타를 기사회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었다. 미군은 한국전쟁이 장기화되자 가까운 일본에서 군용트럭을 조달하기로 하고 새로 발족한 경찰예비대와 함께 도요타에 각각 1천대씩의 트럭을 주문하는 등, 한국 전쟁은 도요타가 기업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카롤라라는 모델이 인기를 끌면서 일본 모터리제이션 이끌고,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국시장에서도 오일쇼크 계기로 저연비 차량이 각광 받으면서 도요타 자동차가 새롭게 부상하게 된다. 이때 선보인 자동차로는 55년 크라운, 57년 코로나, 61년 퍼블리카였고, 모두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기반을 잡아갔으며, 이때 선보인 모델들은 오랫동안 모델 체인지를 거치며 도요타의 인기 모델의 역할을 하게 된다.
내수시장의 활성화와 본격적인 미국시장 진출
60년대는 일본 자동차산업에 아주 중요한 전환기로, 도쿄 올림픽이 열린 64년 일본은 연간 50만 대를 넘어 58만 대의 차를 만들었다. 이때 도요타 카롤라와 닛산 서니는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며 일본의 모터리제이션을 이끌었는데, 사람들은 두 차의 머릿자를 따서 SC전쟁으로 불렀다.
도요타를 일본 제일의 메이커 자리에 확실하게 앉힌 카롤라는 그 후 83년 초 생산 1천만 대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포드 T형(1천500만 대), 폴크스바겐 비틀(2천만 대)에 이은 세 번째 1천만 대 돌파모델이었다.
70년대 들어서도 도요타는 모델 수를 계속 늘려갔다. 70년에는 일본의 첫 스페셜티카 셀리카가 나왔고, 셀리카의 형제모델인 카리나로 카롤라와 코로나의 틈새를 메웠다. 도요타는 차종마다 엔진과 스타일을 조금씩 달리해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폈고, 70년 연간 생산 100만 대, 72년 생산누계 1천만 대를 돌파한데 이어 70년대 중반에는 일본 승용차시장의 33%를 점유했다.
또한 세계시장에서도 카롤라는 미국 소형차시장에서 인기를 모았고, 73년 전 세계를 덮친 2차 오일쇼크로 작고 경제적인 차를 찾게 됨에 따라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도요타는 75년 미국시장에 27만8천 대를 팔아 폴크스바겐을 앞지르고 미국내 수입차 판매1위에 올랐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카롤라였다.
최근동향
미국시장에서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도요타는 미국의 누적되는 대일 무역적자로 인한 수입규제의 벽에 부닥친다.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브랜드들은 이에 맞서 81년부터 자율규제를 통해 미국시장을 공략하게 된다. 이시기 도요타는 일본차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88년 미국시장용 디비전 렉서스를 설립, 고급모델은 렉서스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또한 현지화를 가속화시켜 84년부터 캘리포니아의 GM과의 합작 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자동차의 인테리어와 장비를 미국식으로 꾸미는 등 적극적인 세계시장 공략에 나선다.
자동차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퍼스널카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에 발맞춰 도요타는 80년대부터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고 MR2(84년), 셀리카(85년), 소아라(86년) 등의 새 모델을 선보였다. 또 연료분사장치, 안전 브레이크, 특수 서스펜션 등 전자장비도 크게 늘렸다.
90년대 들어서는 내수침체와 엔고로 인한 어려움, 동남아 국가들의 IMF 한파 등의 위기를 맞기도 하나 그때마다 적절한 전략의 수립과 시행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일본 제 1의 자동차기업으로 세계 자동차 시장의 주요 기업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최근 GM, 포드 등 선진국의 대형업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업 간 합병바람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생산대수 기준으로 1위 GM, 2위 포드에 이어 세계 3위였던 도요타는 98년 폴크스바겐에 3위 자리를 내준 데 이어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병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최근 미쓰비시와 전략적 제휴를 선언함에 따라 5위 자리로 밀려날 위기에 있다.
그러나 도요타는 양적인 크기만큼이나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며 여기에 '판매의 도요타' 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뛰어난 마케팅이 어우러져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가능성이 높으며, GM, 폴크스바겐 등과 차세대 저공해차 개발을 공동추진하기로 하고 인터넷 부품구매도 공동으로 추진하는 등 협력관계를 강화하면서 독자 생존하는 방법을 택해 '빅5' 자리는 굳건히 다질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 자료

없음
*병*
판매자 유형Bronze개인인증

주의사항

저작권 자료의 정보 및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해피캠퍼스는 보증하지 않으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 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의 저작권침해 신고센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불정책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이런 노하우도 있어요!더보기

찾던 자료가 아닌가요?아래 자료들 중 찾던 자료가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더보기
최근 본 자료더보기
탑툰 이벤트
도요타 생산방식과 그 적용된 사례
  • 레이어 팝업
  • 레이어 팝업
  • 레이어 팝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