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과 개화정책
- 최초 등록일
- 2007.10.29
- 최종 저작일
-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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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의 개화사상과 개화정책에 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개화사상(開化思想)의 형성
2. 개화(開化)정책(政策)의 추진
3. 개화운동(開化運動)의 발전
본문내용
개화사상(開化思想)과 개화(開化)정책(政策)
개화운동(開化運動)
1. 개화사상(開化思想)의 형성
개화(開化)는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백성(百姓)을 교화(敎化)’한다는 뜻이다. 조선(朝鮮)에서 개화(開化)라는 말이 쓰인 것은 대략 1880년대부터라 하는 데, 이는 1870년대 일본(日本)에서 유행한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말이 1876년 개항(開港) 후 조선(朝鮮)에 들어온 것이라 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쓰인 개화(開化)라는 말은 ‘문명(問名)화(化)’나 ‘서양화’, 또는 이들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일컫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개화사상(開化思想)이 정확히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일찍이 문호개방(門戶開放)을 주장한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흥기 등이 그 선구적(先驅的) 역할을 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학파(北學派)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는 두 차례 청에 가서 서양(西洋)문물(文物)의 우월성과 개항(開港)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오경석은 실학자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서 수차례 청을 다녀온 역관(役官)이었고, 유흥기는 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이 개화사상(開化思想)을 갖게 된 데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있다. 먼저 내적 요인이라 함은 조선(朝鮮)후기 실학사상(實學思想)이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들을 대게 박지원(朴趾源), 정약용, 김정희(金正喜) 등 실학자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을 극복하고 청의 문물이라도 ‘이용후생(利用厚生)’ 차원에서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박지원(朴趾源)의 사상이 그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의 개국(開國)통상론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오경석(吳慶錫), 유흥기를 비롯한 다른 개화사상(開化思想)가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실학사상(實學思想)과 개화사상(開化思想)의 인적 연계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외적 요인은 청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청을 다녀온 경험이 있거나 「해국도지」·「영환지략(瀛環志略)」등 청의 개화관련 서적을 읽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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