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현대사
- 최초 등록일
- 2007.10.20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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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얀마의 이해 중 미얀마의 현대사를 알아보자
최근의 미얀마 사태가 벌어진 윈인은 독립 후 국내 정세의 영향이다. 왜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후의 전개는 어떻게 되었는지데 대해 알아본다.(11page)
목차
미얀마의 현대사
1. 우 누( U Nu)와 불교사회주의
2. 네 윈(Ne Win)과 버마식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
3.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와 아웅 산 수지
본문내용
독립 후 신 정권 하에서 미얀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꺼인족, 샨족 등 소수종족들이 이전에 아웅 산이 삔롱(Pvinlong)에서 약속했던 소수종족 자치주의 실현을 거세게 요구하였고, 무장항쟁을 통한 독립을 주장하다 공산정권의 수립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삼는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정국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파시스트민중자유연맹과 결별한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3월의 폭동 직후 점진적 공산정권을 주장하던 트로츠키류의 적기파 공산주의자들이 CPB(Communist Party of Burma)를 결성했고, 즉각적인 공산정권수립을 외치던 스탈린의 백기파 공산주의자들은 BCP(Burmese Communist Party)를 각각 창당하였다. 이들은 1953년 정당 활동이 금지된 후에도 다른 정당 또는 단체들과 공동 전선을 펴 활동했고 1958년에 이르러서야 과도정권을 이끌었던 네 윈의 탄압정책으로 양곤 등 대도시에서는 크게 쇠퇴했다. 게다가 당내의 의견 차이로 공산당이 분열되어 나가고, 당의 군대라 할 수 있는 삐두 예보 혹은 인민의용군(People`s Volunteer Organization)도 공산당을 따라나선 백기파와 당에 잔류한 황기파로 분열되었다. 인민의용군은 해방 후 정식으로 미얀마연방군이 창설되면서 이에 흡수되지 못한 사람들로서 아웅 산의 동료들에 의해 조직되었던 군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독립 후에도 조직을 해체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아웅 산의 피살 후 향후 노선방향을 놓고 분열되었다. 더 이상의 존립의의가 없다고 판단한 일칭 황색기 인민의용군과, 아직도 독립을 인정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하고 계속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백기 인민의용군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공산당과 손을 잡고 계속 폭동에 가담했던 인민의용군은 백기파가 대부분이었다.
중략-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령관 네 윈은 우 누와 각료들을 모두 구금시킨 채 버마식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쇄국정치의 막을 열었다.
네 윈은 연방을 유지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동시에 경제문제를 해결한 후 원대복귀를 언명했다. 그러나 한달 후 이런 성명과는 달리 혁명위원회(Revolution Council)의 세인 윈 준장으로 하여금 “군부의 권력 장악은 미얀마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후반부 혁명이다.” 라는 성명을 발토록 하여 혁명과업이 완수될 때까지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참고 자료
미얀마의 이해
김성원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2년 0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