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향교와 서원교육
- 최초 등록일
- 2007.10.19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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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시대 향교
1) 향교의 설립과 기능
2) 향교의 입지와 배치
3) 향교의 재정
4) 향교의 교관과 교생
5) 향교의 교육과정
6) 근대교육제도와 향교
2. 서원
1) 서원의 설립
2) 서원의 입지와 지역적 분포
3) 서원의 전개
4) 서원의 운영
5) 서원의 교육활동
3.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조선시대 향교
1) 향교의 설립과 기능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인데 현재로는 국공립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향교는 본래 경학 또는 국학에 대칭되는 지방의 학교라는 의미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후기에 와서 비로소 일반화된 명칭이지만, 중국에서는 수도의 국학이나 태학에 대칭되는 지방의 학교란 뜻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다.
2) 향교의 입지와 배치
향교는 대체로 고을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수령이 머물며 정사를 펴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였다. 이것은 사립교육 시설인 서원이 고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 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한 것과는 대조적이다.특이한 것은 나주향교나 고령향교에서와 같이 사찰이었던 곳에 향교를 세운 경우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선왕조가 숭유 정책을 내세워 의도적으로 불교를 탄압하던 시책의 하나로서 사찰을 폐지하고 향교를 세웠다고 보인다. 향교가 고을 중심부에 자리하였다고 해도, 교육 활동을 행한다는 성격으로 인해 냇가나 산기슭 등 비교적 조용한 곳에 위치하였다. 광주향교나 전라도의 보성향교는 냇가에, 충청도의 연산향교나 경상도의 선산향교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는 성균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어, 기본적으로 성균관의 구조인 대성전, 명륜당, 재실의 구조를 따라서 건립되었다.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한 배향 공간으로서의 대성전, 즉 문묘, 학생들이 머무는 재실 및 기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재실은 그 수요에 따라 동재, 서재로 나뉘었는데, 이는 위치의 차이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성격에서도 구별되었다. 즉 양반자제들은 동재에, 일반 백성들의 자제는 서재에 기숙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러한 향교의 건물 배치는 평지의 경우에는 나주향교에서와 같이 전면이 배향 공간이고, 후면이 교육 공간이다. 반대로 산기슭의 경우에는 상주향교에서와 같이 전면이 교육 공간이고 후면이 배향공간이며, 때로는 밀양향교나 제주향교에서와 같이 문묘와 명륜당이 나란히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참고 자료
한국의 전통교육 (정낙찬, 이동기, 채휘균)
한국의 전통교육 (최완기)
조서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한국교육사 (서울대학교교육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