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 후집 漁父辭 굴원
- 최초 등록일
- 2007.06.25
- 최종 저작일
- 2007.06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고문진보 후집 漁父辭 굴원 문답체로 된 운산합성(韻散合成)의 이야기로, 《사기(史記)》의 〈굴원전(屈原傳)〉에도 보인다. 이 이야기체로 쓴 글은 초나라의 굴원 스스로가 지었다고도 하나 후세 사람이 지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조국에서 추방되어 초조히 강가를 방황하는 굴원이 어부의 물음에 답하여 이 세상의 오탁(汚濁)에 물들지 않으려는 깨끗한 자기의 의지를 말하는데, 은자(隱者)인 어부는 이 세상의 청탁(淸濁)에 구애받지 마라 하며 〈(滄浪歌)〉를 부르면서 떠나간다. 그러나 《사기》에는 어부가 부르는 이 민가(民歌)는 없고 전절(前節)에서 끝난다. 이 작품은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초사`가운데 하나이다. 초사는 애절한 정조가 지배적이며 화려한 장식이 뛰어나다. 굴원은 원래 초나라 회왕을 도와 눈부신 정치 활동을 하였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을 당하였는데, 방랑 생활을 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해 물에 몸을 던진 것으로 유명하며, 굴원의 강직한 성품이 어부의 삶의 자세와 대조되어 더욱 빛나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시에 등장하는 어부는 당시의 隱士(은사)였다고 전해지나 사실은 굴원이 이러한 인물을 假設(가설)하여, 자기의 절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았다고 생각되어 진다. 또한 굴원 자기 자신의 글인지도 확실치 않으며, 아마도 굴원에 관한 傳誦(전송)을 후세 사람이 그의 작품 집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이 글에는 그의 성격이 진실되고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그가 멱라수 에 빠져 죽을 것을 예언 한 듯한 구절도 보이는 데 , 그 처럼 청렴 결백한 사람이니까 , 당연히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고,그 자신도 亡國(망국)의 참상을 참아 보지 못하여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어부와 같은 처세는 그 때와 같은 난세에는 타당한 것이었겠지만 ,굴원의 충성스러운 심정으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이 전이 그가 후세의 사람들한테서 愛慕(애모)와 동정을 받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屈原旣放에 游於江潭하야 行吟澤畔하다.
나 굴원이 이미 죄를 입어 내쳐짐에 강담에서 놀다가 상강의 가에서 다니며 읊조렸다.
顔色憔悴 形容枯槁.
안색이 초췌하고 형색과 용모가 말랐다.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於斯.
어부가 굴원을 보고 말하길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어떤 까닭으로 이에 이르렀습니까? ”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굴원이 대답하길 “모든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청정하고 모든 사람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 홀로 술이 깨였으므로 그래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어부가 말하길 “성인은 만물에 응체하지 않고 세상과 함께 미루어 이동합니다.”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
“세상 사람이 모두 혼탁한데 어찌 그 진흙을 파서 파도에 던집니까?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醨.
여러 사람이 모두 취했는데 어찌 그 술찌꺼기를 먹고 그 진국의 찌꺼기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何故深思高擧 自令放爲.
“어떤 까닭으로 깊이 생각하고 높이 천거되어 스스로 추방을 당하게 하십니까?”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굴원이 말했다. “저는 새로 머리감는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고 새로 목욕하는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고 들었습니다.”
安能以身之察察로 受物之汶汶者乎리오.
어찌 능히 몸이 맑고 깨끗함으로 만물이 더럽고 욕됨을 받겠습니까?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차라리 상강 흐름에 다다라서 강 물고기의 배 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희고 흰 지조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쓴단 말이오?”
漁父莞爾而笑 鼓枻而去.
참고 자료
고문진보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