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외교담판에 대한 새로운 해석
- 최초 등록일
- 2007.06.22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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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희의 외교담판에 대한 글입니다. 서희의 외교담판이 주는 현대적 의미와 한국외교의 문제점에 대해 서술하였습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본론
(1) 거란과 고려의 관계
(2) 거란의 고려 침입과 강화협정
(3) 서희의 외교담판의 성공 요인
(4) 현대적 관점에서 본 서희의 외교 담판
Ⅲ. 결론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해 본 한국 외교의 문제점
ⅳ. 마치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최근 세계는 국제화의 흐름 속에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타국과의 관계를 무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타국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것이 외교이다. 외교는 이제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 되었다. 북한을 보더라도 외교관계에서 도태되는 나라가 어떠한 결말을 맺게 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우리 나라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외교적 갈등을 많이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서희의 외교담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고려의 외교가이자 문신으로써 전 960년(광종11년) 문과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이런 서희는 거란족의 침입에 전쟁이 아닌 대화의 방법으로서 거란과의 협상에 성공하면서 당시 강동 6주의 영토를 획득하였을 뿐 더러 국제 정세를 이끌었다. 이러한 서희의 성공적인 담판의 이면에는 외교관으로써의 탁월한 개인적 능력뿐 아니라, 그 당시 고려의 대외적인 외교정책의 뒷받침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현대적 시점에서 서희의 외교 담판을 알아보자.
Ⅱ. 본론
(1) 거란과 고려의 관계
고려는 성립 초부터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으며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서경을 중시하고 청천강 이북으로 영토 확대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뻗치던 거란과 세력 다툼을 벌여야 했다.
거란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당나라 말 혼란기에 야율아보기가 나와 부족을 통일하면서 큰 세력을 이루었다. 앞으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고 배후에 있던 발해를 쳐 무너뜨렸다(926). 947년에는 나라 이름을 요라 하였다. 960년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거란과 송나라는 날카롭게 맞섰다.
고려는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을 처음부터 적대시했고 이에 대비하였다. 태조 25년(942)에 거란에서 사신과 낙타를 보내오자, 사신은 먼 섬으로 유배 보냈고 낙타는 개성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아울러 태조는 훈요10조에서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규정하고 계속 경계토록 후대 왕에게 훈계하였다. 정종이 광군 30만을 조직한 까닭도 거란에 대비하려는 조치였다. 그리고 정종과 광종대에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진을 쌓아 거란에 대비하였다.
거란은 송나라와 전쟁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고려를 제압해 자기편으로 삼아야 했다. 먼저 거란은 압록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여진족을 누르고, 이어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쳐들어가 무너뜨렸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거란의 고려 침입과 강화협정
참고 자료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