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강경애의 인간문제
- 최초 등록일
- 2007.06.16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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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강경애의 약력과 <인간문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지식, 그리고 개인적인 감상을 적은 레포트입니다. 객관적인 자료뿐 아니라 주관적 감상이 필요한 분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목차
1. 강경애의 생애
2. 카프문학
3. [인간문제] 속 정치적 이데올로기
4. 작품에 대한 감상
본문내용
1. 강경애의 생애 (1906.4.20~1943.4.26)
강경애는 황해도 장연 출생. 아버지를 일찍 여윈 뒤 힘들고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1921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다니다 기독교적 보수주의 교육체제의 지나친 통제와 간섭에 반발해 동맹 휴학을 이끌다 퇴학을 당했다. 이 무렵, 장연 태생의 동경 유학생 양주동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서울 동덕여고에 편입하기도 했으나 그와 헤어지고 난 뒤 장연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문학공부를 시작하며 시를 발표했고 직접 ‘흥풍야학교’를 세워 무산계급의 아동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1929년 당시 여성운동단체 였던 ‘근우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진취적인 여성운동을 펼쳐나갔다. 1931년 잡지 ‘혜성’에 장편소설「어머니와 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으며, 1932년 간도로 이주한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해 단편소설「부자」「채전」「소금」등을 발표했다. 1943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인간문제」를 연재, 근대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강경애의 대표작이 되었다. 1935년 이후 「해고」「어둠」등 사회의식을 강조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9년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신병이 약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44년 4월에 지병의 악화로 결국 사망했다.
▪ 근우회-3.1운동 이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립, 병존하던 여성단체는 1927년에 여성해방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아래, 한국 여성의 대동단결을 꾀하고 모든 운동을 효율화하여 새로운 여성운동을 전개하려는 취지로 근우회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각지와 일본 및 만주에 지부를 두었다. 본부에는 재무부, 서무부, 선전조직부, 교양부, 정치연구부, 조사부를 두었다. 회원은 만 18세 이상의 여성으로, 2명 이상의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가입할 수 있었으며, 회비를 내어야 했다.
주요 활동은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야학 실시, 문맹 퇴치, 여공파업의 진상 조사, 광주학생운동 및 각종 항일학생운동 지도와 지원 등이다. 그리고 근우회는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함, 교육에서의 성적 차별 철폐,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정치적 차별 철폐, 조혼 폐지 및 결혼 이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휴가와 임금 지불, 부인과 소년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야업 폐지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자들이 점차 그들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함으로써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자들과 사상적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1931년 해산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