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 최초 등록일
- 2007.05.20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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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을 일반적인 역사책에서 보는 입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재평가 해 봤습니다.
목차
광해군의 약력
광해군에 관한 오해
광해군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광해군의 약력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공빈 김씨로서 적통이 아닌 서자 출신이다. 의인왕후 박씨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첫째아들인 임해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성격이 포악하다고 하여 보류하고, 1592년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광해군이 책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 유영경도 적통론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상황의 반전으로 유영경은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권고로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영창대군 ·능창대군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1624년 서인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이 능양군을 받들어 인조반정을 단행하여 이이첨, 정인홍은 죽이고, 광해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에 죽었다.
광해군에 관한 오해
1. 임해군은 광해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본디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다하여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해군은 자신이왕위 계승자라면서 항시 광해군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이를 귀양보낸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교동별장이역적의괴수임해군이<<이달(5월)2일에>> 죽었다고 입계하니 전교하기를, 이 서장을 보고 놀랍고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곧 예조의 낭관을 보내어 후한 예로써 염빈하도록 하라. 비망기로 이르기를, 임해의 빈소에 조석으로 지내는 제전을 본관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경기 감사에게 하달하고, 귀후서에 있는 관 1부를 즉시 교동으로 보낼 것이며, 교동 별장 이정표는 임해군이 중병에 걸린 사실을 신속하게 치계하지 않았으니, 추고하여 치죄하도록 하라.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