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윤이상의 생애와 작품세계
- 최초 등록일
- 2007.02.14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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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무대에서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추앙받던 보기 드문 음악적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반평생을 조국을 잃은 유민으로 살다가 끝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기이한 운명의 길을 밟아야했던 한국 태생의 독일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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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생을 조국을 잃은 유민으로 살다가 끝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기이한 운명의 길을 밟아야했던 한국 태생의 독일 작곡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에서 칠원 윤씨의 6대 증손으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다.
시인인 부친 윤기현은 중국 역사와 문학에 밝았다. 생모는 농부 출신으로 소실이었다.
933년에서 36년까지 윤이상은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첼로와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1936년에서 38년까지 통영에서 국민학교의 교사를 지냈고 그 후 도쿄에서 도모이로 이케노우치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윤이상은 한국으로 돌아와 해방전후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943년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뒤 2개월만에 풀려 나왔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한 고아학교를 관리했고 부산과 서울에서 교사 대학강사 그리고 작곡가로서 활동을 하였다.
그는 관현악 곡들과 미완성의 첼로 협주곡 그리고 영화음악 실내악곡들을 발표했으며 1955년에 그는 현악사중주 1번과 피아노 삼중주로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유럽으로 유학을 결심하고 1956년 6월부터 파리에서1년 공부하고 1957년 8월 베를린으로 가서 Boris Blacher규수에게 사사.
1966년 "도나우징엔 음악제"에서 대편성 오케스트라곡인 "예약"으로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그는 1963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옛 벗 최상한을 만나고, 강서고분 벽화 `사신도`를 보고, 이후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져 개인별장을 얻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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