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 최초 등록일
- 2006.12.31
- 최종 저작일
- 2006.10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관한 분석과 견해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북한의 역사가와 당료들은 한국 공산주의의 전통을 김일성의 유격대시절(항일무장투쟁)에서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북한의 정치 도덕적규범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이해 하는 것은 큰 의의를 둘수있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시작은 1932년 만주사변이후 만주 전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유격대 건설이 시작될 때 부터이다. 김일성도 1932년 4월 안도에서 소규모의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후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의 사장(師長)이 되었으며 곧이어 1936년 7월에는 유격대 편제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그 후 그의 권력 형성에 크게 도움을 준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을 주도하고 1937년 6월에 ‘보천보전투’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의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부대원을 이끌고 고된 행군길에 올랐다. 이때는 많은 부하들과 동료들이 죽거나 변절하고 혹독한 추위와 식량난과 피로, 병, 적과의 투쟁 등으로 고생이 너무나 막심했음에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이후 마에다 토벌대 전멸등의 혁혁한 전공을 세우나 1939년말 시작된 일본의 토벌과 소련과 일본의 대외적 관계로 인하여 만주전역의 유격대는 극심한 타격을 받고 김일성은 이때 소련으로 도피해서 들어간다. 이곳에서 ‘소련극동군사령부정찰국소속’ 88특수여단에서 활동(대위)하다가 1945년 입북하게 되는것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기간이라고 볼수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보고 다른해석과 다른 평가를 하는 것 일까? 예를 들면 ‘보천보전투’에서 긍정적인 작가의 서술내용을 보면 ‘김일성의 부대는 관공서와 그 밖의 건물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5명의 경관은 도망가서 한명도 죽지 않았다. 업혀있던 경관의 아기가 유탄에 맞아 죽은것과 일본인 요릿집 주인이 살해된 것이 예외적인 죽음이었다’ 이다.
부정적인? 혹은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작가의 입장은 ‘김일성의 유격대 시절에서 가장 크고 성공적이었던 전투는 만주 접경의 한국 마을 보천보 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가 이끄는 약 200명 규모의 제1로군 제2군 제6사는 1937년 6월 4일에 이 마을을 공격하여 지방 관서를 파괴하고 일본 경찰지서와 지방소학교와 우체국을 방화했다. 그는 지방주민들로부터 4000엥 을 걷어 들였고, 16000엥 으로 추산되는 손해를 입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