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국교수립
- 최초 등록일
- 2006.12.2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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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65년 6월 한일 국교 수립후 3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과거사 청산 문제를 둘러싼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전후 한일관계는 이른바 `과거사 논쟁`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한일과거사 갈등의 연원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인식의 괴리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른바 한일관계의 `65년체제`를 형성시킨 한일조약이 과거사 청산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문제가 하나의 의문으로 떠오른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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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한일조약 타결논리의 문제점
1951년 10월 교섭의 개시로부터 1965년 6월 한일조약의 체결에 이르기까지 14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된 한일회담은 세계외교사에서도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난항과 파란으로 점철된 마라톤교섭이었다. 이 교섭의 본래 목적은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가 남긴 유산을 청산하고 양국 간의 정상적인 새로운 정치, 경제관계를 수립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현격한 인식차로 말미암아 이 교섭은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겪은 후에야 타결될 수밖에 없었다.
한일회담의 타결을 촉진시킨 냉전논리의 첫 번째 힘은 전후 국제체제의 냉전구조와 이와 연계된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라는 형태로 작용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서방진영에 위치한 일본과 한국을 정치경제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중국-소련-북한으로 이어지는, 공산권에 대항하는 동아시아의 반공전선을 확고히 구축하고자 의도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후 패전국 일본에 대해서 징벌적인 성격이 농후한 대규모의 배상을 요구하려던 애초의 정책적 입장을 180도 선회하여 일본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부흥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이러한 대공산권 봉쇄전략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면 미국의 한일회담타결에 대한압력은 1950년대의 수준을 뛰어넘어 더욱 고조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동아시아의 안보정세가 그 이전보다 긴박의 도를 더해가는 것과 함수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베트남의 정세가 악화되는 속에서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는 방향으로 아시아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동아시아의 안보 공약은 상대적인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 냉전의 전초기지인 한국의 안보문제가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더욱이 한국의 베트남파병 결정은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강구하도록 촉진시키는 변수로 작용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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