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1920년대 독립운동
- 최초 등록일
- 2006.12.27
- 최종 저작일
-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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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중 1920년대 벌어졌던 독립운동에 대해 기술한 자료
목차
1. 독립 전쟁론
2. 봉오동 전투
3. 훈춘(琿春) 사건
4. 청산리 전투
5. 독립군 부대의 시련
6. 1920년대 만주 지역의 운동 조직
7. 만주 지역의 민족 유일당 수립 운동
본문내용
1. 독립 전쟁론
3․1 운동의 실패는 민족 운동가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비폭력의 평화적 방법으로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민족의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독립 운동의 노선과 방략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뜻 있는 민족 운동가들은 독립 전쟁 노선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 지역을 독립 전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투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자료1]
1920년대 초반 무렵 만주 지역에는 무장 투쟁을 목표로 70여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다.[자료2] 이들 독립군 부대는 국내에 자주 진입하여 관공서를 습격하고, 일본 군대나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자료3]
2.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6일 홍범도[자료4]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 국경 초소를 습격, 격파하였다.
이 무렵 독립군이 국내에 자주 진입하고, 국경 맞은편의 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계속 긴장하며 방비책을 찾고 있었다. 따라서 강양동의 전투는 대규모 전투의 계기가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은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벌였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유도한 후 일제히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일본군 제19 사단장은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고, 독립군은 작전상 퇴각하여 지리상 유리한 지점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안산과 고려령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처럼 거듭된 참패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다시 독립군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들어왔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계곡 지대이다. 이곳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던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