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화]독일의 통일 과정
- 최초 등록일
- 2006.12.24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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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일 문화에 대한 부분중 통일을 뺴고 논할수는 없습니다. 독일의 통일과정을 가지고 문화를 집어봅니다.
목차
1. 독일의 분단
2. 서독의 경제적 우위
3. 동독 계획경제의 실패
4. 국가안전부
5. 동독 주민의 탈주와 장벽
6. 동서독의 접근
7. 동구의 민주화
8. 동독의 변화
9. 베를린 장벽의 붕괴
10. 동독의 민주화
11. 통일 방안
12. 독일의 통일
13.
본문내용
동독 주민의 탈주와 장벽
동독이 세워진 1949년 9월부터 경제, 정치적인 이유로 점점 더 많은 동독 주민들은 서독지역으로 도망을 갔다. 그 결과 서독과의 경계지역에 철조망이 쳐 지기 시작했으며 동서독간의 국경 폐쇄는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으로 최고조에 이른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1961년 8월까지 모두 270만 명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갔다. 장벽을 세우기 직전에는 하루에 1,500명에서 2,000명의 사람들이 도망을 쳤는데 1961년 8월 1일부터 13일까지만 해도 대략 47,000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이 기술을 갖춘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탈주는 동독의 경제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서독과의 접경지역은 그때 이미 거의 모두가 철조망과 지뢰매설로 차단되어있었기에 베를린 시만이 유일하게 남은 탈출구였다. 하지만 이마저 1961년 8월 13일에 막히게 된다. 베를린 장벽.
1963년 12월 17일 서독정부는 동독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통행조약을 맺고 베를린시민에 국한해서 상호간의 방문을 가능하게 했다.(1963년 12월 19일부터 1964년 1월 5일까지 70만 명의 베를린 시민들은 120만번의 방문을 하게 됨).
하지만 서독은 통행조약에서 동독을 주권 국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으며(동베를린에는 대사관이 아닌 무역대표부만 있었음), 그 결과 제한된 수의 상호방문은 1966년에 다시금 중단된다.
그래도 동독은 긴급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를 위해서 하나의 통과소는 남겨두었다.
규칙적인 상호간의 방문은 1971년 사민당 정부에 의해서 다시금 가능해진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