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최근 동북 공정을 보면 그야말로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중국의 행보는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의도가 보이는데 이러한 의도 속에는 장차 21세기에 대국으로 성장하면 옛 명, 청 시대와 같이 중화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동북아 및 세계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는가? 바로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었던 한때는 동북아시아를 주름 잡던 최강국이었던 나라다. 그 최강국이었던 A.D400년경에는 광개토대왕이 건재해 통치하고 있었다. 그분의 흔적은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관련된 자료들을 소개하겠다.
목차
서론
본론
○광개토대왕릉비 소개
○광개토대왕릉비의 연혁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원문)
○신묘년조 기사와 관련된 연구들.(비문변조설 관련)
○신묘년 조 기사의 해석
○그 외 다른 기사들 관련
결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최근 동북 공정을 보면 그야말로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중국의 행보는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의도가 보이는데 이러한 의도 속에는 장차 21세기에 대국으로 성장하면 옛 명, 청 시대와 같이 중화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동북아 및 세계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는가? 바로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었던 한때는 동북아시아를 주름 잡던 최강국이었던 나라다. 그 최강국이었던 A.D400년경에는 광개토대왕이 건재해 통치하고 있었다. 그분의 흔적은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관련된 자료들을 소개하겠다.
○광개토대왕릉비 소개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비문 내용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가의 내력과 호태왕의 행장, 그리고 비를 세운 목적을 간단히 기록하였다. 둘째 부분은 호태왕 정복사업의 이유와 과정, 그리고 결과를 열거하고 있는데, 거란과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시켜 신라를 구했으며 동부여 등을 멸망시켜 정복한 지역이 촉 64성, 1,400촌이라는 내용이다. 셋째 부분은 왕릉을 관리하는 수묘연호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연혁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세워졌다. 그 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완벽한 묘지기 제도 아래서 잘 보존되었다. 그러나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보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옛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당나라 군병을 주둔시켰다.
참고 자료
1. 서길수,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 사계절, 2004.
2.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평양, 1966
3. 왕건군, [호태왕비연구], 1984, 역민사, 1985
4. 고구려연구회, [광개토호태왕비연구 100년], 1996
5. 한국역사 연구회,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3
등 다수문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