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 전적지(동학 농민 운동 최대의 격전지)
- 최초 등록일
- 2006.12.06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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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금치 전적지는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동학농민운동의 향방을 결정한 우금치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며, 그곳에서의 패배로 동학
목차
1. 개요
2. 우금치 전투의 과정
3. 우금치 전적지
1) 우금치 전적비의 연혁
2) 충남에 남아 있는 동학관련 유적지
본문내용
1. 개요
우금치 전적지는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동학농민운동의 향방을 결정한 우금치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며, 그곳에서의 패배로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던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이며, 일본군과 정면으로 대적한 항일운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우금치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곳으로 우금치는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높은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비우금 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한다는 목적으로 재봉기하였고, 당시의 우금치는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도에서 나타나듯이 이곳은 산이 많고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이 이곳을 넘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특히 기관총과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는 더더욱 쉽지 않았던 곳이다.
2. 우금치 전투의 과정
1894년(고종 31년)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과 일본 ․ 조선 정부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싸운 최대 규모의 전투로 농민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전투였으나, 농민군이 대패함으로써 농민전쟁 실패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발단
1894년 6월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평양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은 조선정부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하는 등 남하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그해 9월 전봉준은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친일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동학 남접 ․ 북접 연합전선을 이루었고 공주-수원-서울의 진격로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우선 4,000명의 직속부대를 이끌고 공주로 북상하면서 그해 10월 중순 논산 풋내에서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부대가 합류했고, 이들은 2만여 명의 군세로 공주를 완전히 포위하여 일시에 총공격을 하기로 했다.
참고 자료
김양식, 『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목원대학교 건축근대사연구실.『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충청남도, 2004.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