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1950,60년대 사회 · 경제적 배경
Ⅲ. 1950,60년대 영화 장르상의 특징
Ⅳ. 1950,60년대 영화의 역사적 의의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한국전쟁 이후 잠시 주춤했던 우리 영화계는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제 2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이시기에 이르러 우리 영화계는 과거의 영세한 수준의 모습을 탈피해서 어느 정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와 기자재를 마련하게 되었고, 새로운 영화 인력들을 갖추어 활력있는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인들을 위한 전문교육기관인 서라벌 예술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전문적인 소양을 키운 영화인들이 배출되기 시작했으며 전란 이후 신축된 극장과 마을 곳곳의 가설극장을 통해 우리영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1950~60년대의 영화는 현재 영화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어떠한 작품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자.
Ⅱ. 1950,60년대 사회 ‧ 경제적 배경
1950년은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이다.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국 영화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 공산군은 영화인들과 영화 기재를 납북해갔다. 따라서 많은 영화인들이 사라졌고 서로 견제하면서 발전하는 것이 정상이었던 좌‧우익의 영화인들은 기형적인 형태로 남과 북으로 편재되었다. 남쪽만을 놓고 볼 때 최인규, 문예봉, 강호 등의 인물들이 북으로 가게 되어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도태되다시피 하였고 남쪽은 친일적인 경력과 우익적 성향이 강하고 영화적 역량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던 인물들이 득세하는 한편 신진 영화인들은 어려운 조건에서 개척자의 입장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피난길에 오른 영화인들은 공보처와 국방부, 그리고 군(軍)과 미군에 소속되어 전시(戰時) 기록영화를 만들어 국민에게 알렸다. 그들은 진해에 주둔한 미군 제502부대의 녹음 ‧ 현상소에서 리버티뉴스 제작에 적극 참여했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만든 국방뉴스 등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임시 수도 부산에 현상소를 마련한 공보처에서는 대표적 친일 영화인인 안종화가 영화 과장을 맡아 대한뉴스를 제작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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