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사]한국의 정치 상황 변화와 체육
- 최초 등록일
- 2006.11.29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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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민정권의 등장
2. 체육에 대한 문민정권의 시각
3. 문민정권의 체육정책
본문내용
1. 문민정권의 등장
1980년대 말 이후 세계사적 변혁의 바람은 한국 정치사의 변혁을 야기하면서 30여 년에 걸쳐 유지되어 온 군부통치를 마감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제3공화국 이후 군사정권이 구사해 온 개발독재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이 저항에 부딪쳐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동구 공산권의 붕괴와 독일 통일, 그리고 구 소련의 와해로 이어진 세계사적 변혁은 분단을 빌미로 유지해 온 군부통치의 명분을 상실케 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한반도에서도 점차 냉전체제로 대변되는 이데올로기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세계질서의 창출을 예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으로 출범한 문민정부는 집권 첫해인 1993년에 편친 일련의 개혁과 사정작업으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인기를 모았다. 공직자 재산공개, 대대적인 군 인사와 군부 숙청, 비리 공직자의 숙청과 금융실명제의 실시 등 강도 높은 개혁작업의 진행을 국민들은 피부로 느끼면서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조치는 1994년에도 계속되었다. 초기의 개혁작업이 이른바 ‘윗물 맑기’의 차원에서 진행되었다면, 1994년에는 제도개혁과 정치개혁, 생활비리 척결 등으로 변화되었다. 이 차원에서 정부조직의 개편이 이루어졌고, 돈 안 드는 선거를 목표로 한 공직자 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제정과 정치자금법 개정 등 각종 정치개혁 입법의 마련이 뒤따랐다. 이와 함께 공무원의 비리를 막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접어들면서 인천 세무 비리, 성수대교 참사 등 대형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이회창 국무총리의 전격 교체 등으로 문민정부의 위기관리 및 국정능력이 의심받기 시작했으며, 야당과의 관계도 경색 일변도로 치달아 김영삼 대통령은 신권위주의의 표본으로 지적되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은 인사 정책에서 실패했다. 임기 5년 동안 개각만 무려 25회를 단행함으로써 일관성 있는 정책 수립과 집행을 어렵게 만들어 문민정권의 위기를 자초했다.
그 결과 1995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개혁은 소리 없이 실종되고, 국민들의 지지도는 20~30% 이하로 추락했다. 이로 인해 6.27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김영삼 정부는 보수 회귀의 경향을 보이게 되면서 분위기 쇄신을 위해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편, 1996년 4월 11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4.11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후유증을 몰고 왔고, 4.11총선 이후 김영삼 정권의 형태는 과거 권익주의적인 군사정권과 다름없는 상태로 바뀌고 말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