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갑신정변
- 최초 등록일
- 2006.11.28
- 최종 저작일
- 2006.01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김옥균의 생애와 갑신정변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조사하여 쓴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김옥균의 생애
2. 김옥균의 활동과 갑신정변
3. 김옥균에 대한 나의 생각
4. 내가 만약 김옥균이었다면
<참고 문헌>
본문내용
김옥균은1851년 1월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병자혼란 때의 두 명신 김상용과 김상헌을 배출한 명문이었으나, 1852년 그가 2세 때 천안으로 집을 옮겨 아버지가 서당 훈장질을 하며 근근이 살아갈 정도로 어려웠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옥균은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집안의 희망이 되었지만 집안이 어려워 아들을 마음껏 공부시킬 수 없었던 아버지는 김옥균을 돈과 권력에서 부족할 게 없는 당숙 김병기에게 1855년 5세 때 양자로 보내게 되었다. 이어 김옥균은 강릉 부사가 된 양부를 따라 16세까지 그곳에서 생활하다 서울로 돌아왔다. 이즈음 서울에서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나돌고 있었는데 김옥균 또한 그러한 움직임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옥균은 22세 때인 1872년 2월 문과에 장원급제해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 등을 거치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젊은 인재로 이름을 날리는 한편 어윤중 김홍집 김윤식 등과도 친교를 맺으며 입지를 다져나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서양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해졌다. 김옥균은 이러한 서양 문물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도 특별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개화에 뜻을 둔 인물이었다. 이어 1881년 이동인 스님의 소개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 6개월 동안 일본전역을 돌아보며 개혁 의지를 다지게 된다. 1882년 32세 임오군란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에게 사과하는 정부의 사절단 일행으로 다시 일본에 가서 개화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다음해에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다시 일본으로 가 개화운동 자금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게 된다.
참고 자료
고쳐 쓴 한국 근대사 - 강만기
근현대 한국 탐사 - 권태억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재곤
역사의 길목에선 31인의 선택 - 역사학자 18인
한국 근대사 - 윤대원
한국 민족 운동사 - 조지훈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 역사학 연구소
www.naver.com - 백과사전
www.goog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