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갑제(里甲制)의 형성과 해체
- 최초 등록일
- 2006.11.1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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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갑제의 형성과 해체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이갑제(里甲制)
2. 이갑제의 붕괴
본문내용
1.이갑제(里甲制)
이갑제는 중국 명(明)나라의 초기의 촌락 자치적 행정제도로써, 1381년 부역황책(賦役黃冊: 戶籍 · 租稅臺帳)의 제정과 함께 설정되었다. 부역(賦役)을 부담하는 호(戶) 110호로 1리(里)를 편성하되, 그 중 부유한 10호를 이장호(里長戶),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甲首戶)로 해서 이를 10호씩 10갑(甲)으로 나누어, 영세해서 부역이 면제되는 호는 여기에 부속시켰다. 즉 지역적으로 근접하는 110호로 일리를 편성하고, 그중에서 정량이 많은 10호를 이장으로 하고, 나머지 100호를 갑수로 하여 10호씩 10갑으로 나누었다. 이 리를 단위로 하여 10년마다 부역황책이라는 호적부를 작성하고, 이장 갑수는 1년 교체로서 이갑의 조세징수의 임무를 맡으며, 10년에 일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명의 정치는 이갑을 통하여 주현으로 부터 향촌에 침투하게 되었으나 다시 태조 말년에 나이 많고 덕이 있는 자를 이노인으로 하고 여기에 교화의 책임을 지게 하여 경미한 사건의 재판을 행하게 하고 리의 공동생활을 자치적으로 운영시키게 하였다.
이갑제는 중앙의 행정명령을 농촌사회 깊숙이 침투시키고 세역의 효율적인 징수 및 촌락공동체의 향촌질서(치안유지, 농민교화 등)를 유지할 목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자치보다는 관치(官治) 보조기구의 색채가 짙었다. 태조는 이갑제의 실시와 함께 호적 및 조세대장인 부역황책(賦役黃冊)을 전국에 걸쳐 작성하여 각호의 토지소유, 인구의 이동과 증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세와 요역을 정하였다. 이와 함께 토지의 정확한 측량을 통하여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을 작성하여 명실공이 향촌사회를 지배하는 기초를 확립하였다.
2. 이갑제의 붕괴
명중기인 15세기 중엽에서 후기에 걸쳐 점차 이갑제가 변질․해체되었다. 이갑제 해체의 원인을 보면, 먼저 이갑제 하에서 지배층은 이장 ․ 이노인 ․ 양장 층이었으나 이들에게 맡겨진 이갑정역(里甲正役)은 10년 1회의 윤번제였으므로 부역징수에 따르는 권한이 특정한 호(戶)̀에 고정되지 못하고 이에 따라 부역징수에 차질을 가져왔다. 또한, 그 위에 이들의 재산등급도 10년 사이에 재해나 질병, 전란 등으로 변화되어 계층분화 요인으로 나타나게 되면서 그 임무를 수행하기 곤란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국가재정과 관리들의 은에 대한 수요도 증대되어 명초에는 비교적 가볍던 부역이 점차 늘어나고 농촌사회를 압박하여 이갑제를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참고 자료
김종박, 2002, 明末淸初期 里甲制의 廢止와 保甲制의 施行, 중국사학회
신채식, 2006, 동양사 개론, 삼영사
오금성, 1999, 명말청초의 사회변화<강좌 중국사4>, 지식산업사
오금성, 1990, 명말청초사회의 조명, 한울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