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20세기 문화와 사상 조봉암
- 최초 등록일
- 2006.11.13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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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봉암의 생애와 사상
목차
1. 서론
2. 본론
①조봉암의 생애
②조봉암의 사상
③조봉암의 정치활동
④진보당 사건의 배경 및 사건 내용
⑤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 한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15분후인 10시 45분 모시저고리에 모시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은 사형수가 형장에 도착했습니다.
가족들은 형무소 정문 앞에서 면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행관이 집행조서를 읽어나가는 동안 그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형시간은 11시 03분 죄수번호 2310번 독립운동가로서 정치가로서 평생을 살았던 조봉암이었습니다.
가진 사람이 갖지 못한 사람위에 군림하지 않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게 공평하게 살아가는 세상
그가 꿈꾸던 진보적인 대한민국의 모습이었습니다.
조봉암은 1899년 경기도 강화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서울 YMCA 중학부를 마친 후 `폭발탄 거사 모의` 사건에 혐의를 받아 평안남도 경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중앙대학 전문부 정치과를 다니면서 조선인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곧 무정부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바뀌었다.
1923년 국내로 돌아온 조봉암은 다시 소비에트 러시아로 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다니면서 이론학습을 한 후 다시 1925년 국내로 들어왔다. 그는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등 공산당 비밀조직활동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검거를 피해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그 후 조봉암은 상해로 돌아와 당시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총지휘하던 코민테른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설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2년 6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에 끌려온 조봉암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때 동상이 걸려 여러 개의 손가락이 잘렸다. 형을 마친 후 인천에서 살다가 1945년 일본 경찰에 의해 잠시 구금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해방 후 조봉암은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결성하고 좌익단체가 중심이 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 의장이 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조선공산당을 지도하던 박헌영에게 편지를 보낸 후 조선공산당과 관계를 끊었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