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중세]카롤링거 르네상스
- 최초 등록일
- 2006.11.09
- 최종 저작일
- 2006.01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중세 프랑크왕국을 지배한 샤를마뉴와 그의 르네상스에 대한 발제문입니다.
3명이 1개조로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물론 성적은 에이쁠이었습니다.
목차
1. 중세의 시작과 그 의미
2. 샤를마뉴
3. 서유럽 황제
4.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
5.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시사점과 한계
본문내용
1. 중세의 시작과 그 의미
‘중세’라는 용어는 15세기 인문주의 운동이 확산되면서 고전고대와 당대의 중간시기, 또는 인문주의와 대비되는 보편주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에 으르러 그리스도교적 이상이 지배한 중세를 이성이라는 잣대로 비판하면서 ‘중세’가 시대개념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한 중세의 시대구분은 보편주의적 그리스도교사상의 변화와 개별주의적인 정치 ․ 경제적 변화를 모두 고려한 가운데 이루어져야한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부르니는 서유럽의 속주가 게르만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를 고대의 종말로 보았으며, 플라비오 비온도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적인 사건을 410년 서고트족의 이탈리아 반도 침입으로 보고 있다. 앙리 피렌네의 경우, 게르만 족, 특히 프랑크족에 의한 통합으로 힘의 중심이 지중해 유역에서 서유럽으로,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족에게로 전이 되었다고 보고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로 대관한 800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고 있긴 하나, 많은 역사가들의 일반적 견해로 볼 때, 중세의 시작을 게르만의 대이동과 로마의 몰락(5세기)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중세를 역사가 페트라르카의 말을 빌어, ‘암흑’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침체’와 혼란의 역사가 유럽사에 드리워졌으며, 이러한 혼돈이 프랑크 왕국에 의해 극복된 다음, 10세기 이후부터는 또 다른 새로운 유럽의 형성을 위한 징조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중세사가들은 1000년 동안에 일어난 역사적 변화에 대한 인식과 편의를 위하여 중요한 발전과 급격한 변화를 기준으로 세 시기로 나누는 데 그 첫 번째 시기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유럽사회의 질서가 재편되고 안정화된 다음 다시 대외적 팽창을 시도한 시기인 10세기경까지이다. 동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진성을 면치 못하던 라틴서방세계에 샤를마뉴의 등장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800년에 그는 단절된 지 오래인 서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를 획득했다. 카롤링 왕조의 팽창은 단지 영토 확대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권의 성립은 서유럽대륙 전체에 걸친 행정적, 문화적 부흥의 현실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화폐제도가 개혁되고 표준화되었으며 화폐주조의 중앙통제가 다시 회복되었다. 그리고 교회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카롤링 왕조는 문학, 철학, 예술, 교육의 부흥을 도모했다. 그의 문화정책으로 인해 로마 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문화가 하나로 융화되어 중세 유럽식의 독특한 문화가 펼쳐지게 되는데 이른바 카롤링 르네상스(8~9세기)이다. 이것은 창조적인 문화 업적보다는 사회개혁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카롤링 르네상스가 중세 서유럽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훗날, 근대에 이르기 까지 장기 지속적으로 남아 영향을 끼치게 된 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으로 발제문의 방향을 잡았다.
참고 자료
주경철,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연옥의 탄생」
나의 비밀 : De secreto conflictu curarum mearum》(1342-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