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원을 둘러싼 삼국의 항쟁
- 최초 등록일
- 2006.11.03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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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삼국의 항쟁의 계기
3. 고구려의 강세와 백제의 고전
4. 계속되는 고구려의 공격과 백제, 신라의 동맹
5. 고구려의 내분과 백제의 한강 탈환 그리고 신라의 성장
6. 백제와 신라의 격전 - 관산성 전투
7.신라의 중원지역 사수
8. 삼국의 격전지였던 중원 지역의 의미와 중요성
참고서적 `전쟁과 역사(삼국편)` 혜안 임용한
본문내용
치열한 삼국의 항쟁이 있기 전 고구려는 소수림왕, 고국양왕대에 본격적인 체제정비를 시도한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지역적.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여 병력동원과 명령계통, 전술운영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편제.훈련.장비의 표준화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 후 광개토왕과 장수왕때 과거의 부족연합군이나 귀족군대의 한계를 넘어선 체계화되고 표준화된 군대를 인솔하고 대정복전에 나섰던 것이다.
이런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물론 북방의 국경선을 넓힌 왕이기도 하지만, 많은 횟수의 남진을 추진했었다. 특히 백제와의 전쟁이 많았는데, 그 중 백제를 한강까지 완전히 밀어내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신라는 자진해서 왕자(나중의 실성왕)를 인질로 바칠 정도로 세력이 아직은 미약했고 ‘왕’이라는 칭호도 없었을뿐 아니라, 기타 국가 체제 정비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광개토왕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백제는 `백잔`이라고 비하하고 왕호도 한 단계 낮추어서 `주`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국가 비슷하게 대우해 준 반면, 성실하게 속국이 되어준 신라는 `동이`(동쪽 오랑캐)라고 부르고 내물왕은 `매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서북변경의 정복으로 만주와 중국의 경계에 있는 천험의 방어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곳에 자신의 땅을 방어 할 수 있는 방벽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렇듯 서쪽 변경이 강화됨으로써 고구려가 안심하고 남진정책을 수행 할 수 있게되었다.
광개토왕은 이미 백제를 한강 이남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한반도의 질서를 완전히 바꾸고, 다음 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항쟁이 치열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전쟁과 역사(삼국편)` 혜안 임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