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의 생애
- 최초 등록일
- 2006.10.31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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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이후까지의 김두한의 생애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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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영화 <장군의 아들>, 드라마 <야인시대>, 그 밖의 수많은 만화책들. 김두한은 때로는 ‘장군의 아들’ 때로는 ‘협객’ 등의 수식어를 달고 방송 매체를 포함하여 수많은 대중들의 입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식지 않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역대 국회의원 인명록에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2세이자 장자구다리 아래서 자고 밥을 얻어 나르던 똘마니였다. ‘입뽕’ 이라는 이름의 협객이 되어 종로를 어지럽히던 신마적 · 구마적을 때려눕히고 공산당을 때려잡던 옛날 얘기로 유명하다. 3대(종로을 · 무소속), 6대(용산 · 한독당)에 걸쳐 재선의원이 되었다. 가는 데마다 뉴스를 만들고 트러블을 만드는 사나이. 6대 국회에서는 오물투척사건으로 구속까지 되었다. 형무소 출입만 해도 무려 80여 회에 달한다.” ‘역대 국회의원 약력 및 헌정일지’ 『한국근현대사 인명록6』 여강출판사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만 보아도 김두한의 인생은 드라마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느낄 수 있으며 당시의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러한 급변하는 격동의 시대에서 김두한의 행보 역시 어느 한 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좌진 장군이 김두한의 아버지란 사실은 김두한의 민족주의 · 반공주의 성향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고 해방 후 극우 · 반공 세력이 공산당에 의해서 암살당한 민족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을 내세워 자신들의 친일활동을 감추고 극한 반공활동으로 좌익 세력을 억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 시대 수표교 밑에서 고아로 자란 김두한은 당시 그 일대를 활보 하고 다니던 건달세력들을 차례로 누르며 종로 일대의 건달 세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김두한은 당시 충무로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 야쿠자 세력과 항쟁을 계속하며 민중들 사이에 ‘항일주먹’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다. 김두한이 ‘항일주먹’으로 민중들의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항일투사’ 였던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이름의 영향도 있었지만 당시 민중들에게 직접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점차 일제에 가담하기 시작했던 지식인들에 비해서 ‘주먹’ 을 이용하여 일본인들을 쓰러뜨리는 통쾌한 모습에 민중들은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항일주먹’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두한은 1945년 8월 해방을 맞게 되었다. 당시 김두한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민족주의적 성향과 항일 정신이 투철하였으나 우익과 좌익으로 대립하기 시작한 이데올로기적인 분열에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중도 좌익 세력이자 민족주의자인 여운형이 건립한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의 ‘치안특별 감찰대’에서 활동하며 아직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의 무장해체를 시켰다.
참고 자료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I』, 역사비평사, 1991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 2005
한홍구, 『대한민국 史 I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겨레 신문사, 2003
『조선제일의 협객 김두한이오』, 동아일보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