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양주시의 문화유적 답사기
- 최초 등록일
- 2006.10.23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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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주시 문화유적 답사후 작성한 글입니다. 직접찍은 사진도 첨부 되어있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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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양주 회암사는 고려 말-조선 전기에 걸쳐 200여 년간 국가 및 왕실의 지원을 받아 왔던 제1의 사찰로 현재에는 그 터가 사적 128호로 지정되어 관리, 보호되고 있다. 회암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내용은 회암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2에 명종 4년(1174년)에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고 하여 고려 중기 이전에도 회암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인도 승려인 지공대사의 관심 하에 그의 제자 나옹에 의해 국찰 규모의 대사찰로 중창되었다.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목은의 기록에 의하면 총 262칸의 전각들로 이루어진 가람은 동방의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목은은 전각배치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현제 기전문화재 연구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관계속에서 계속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무학대사가 거처하는 회암사를 태조가 빈번하게 방문하였고 왕위를 양위한 이후에는 아예 이곳에서 거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세종대에는 효령대군에 의한 불사가 진행되었고 성종대에는 정희대비에 의한 중창이 시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연산군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회암사는 명맥을 이어갔으며, 명종대에 이르러 다시 부흥기를 맞게 된다. 당시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보우는 회암사를 불교 부흥의 거점으로 삼아 명종 20년(1565년)에 화려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 그러나 무차대회 중 갑작스런 문정왕후의 사망으로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회암사 역사 그와 함께 퇴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동안의 발굴조사 결과 폐사의 원인이 화재임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언제인지, 동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명종실록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명종21년:1566년)와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사(선조28년1595년) 내용으로 보아 1566년 1598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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