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성왕의 사비천도
- 최초 등록일
- 2006.10.1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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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백제를 고대의 삼국 중 하나로만 인식하고 백제 한나라에 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한 적은 없었다. 한국고대사 수업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라고 느끼면서 여러 가지 의문점도 생겼다. 의문점이 남아있던 성왕과 사비천도의 그 의미를 조사하면서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고 정리해 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성왕이 단행한 사비천도는 동성왕과 무녕왕이 안정기반을 바탕으로 왕권강화를 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백제의 원래 수도는 한성(위례성)이었으나, 장수왕의 남침으로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고구려의 침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웅진천도와는 달리 자주적인 천도였다. 원래 백제는 5부로 이루어진 지방조직과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였는데, 성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의 힘을 억압하여 백제의 중흥을 꾀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사비천도를 결행했다. 웅진은 주변의 산악과 금강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데 유리했을지 모르나 한 나라의 수도로서 풍모는 빈약하였다. 이에 비해 새로 천도한 사비는 백마강이 흘러가는 사방이 트인 평야지대로서 산악에서 평야로 도읍을 이동하였다는 것은 이제 고구려의 침입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비도성에 대해 말하자면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 밖 남쪽에 세웠다. 사비도성의 시가지는 크게 5부로 구획되고 또한 각 부는 5항으로 나누어지는 등 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 한마디로 사비도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볼 때 가장 잘 디자인된 수도였다. 한국 고대의 도성제 발달 사상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바꿈으로써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하고 새로운 출발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또, 16관등제와 22부제등 중앙관제를 정비하고 수도 5부와 지방통치조직으로서 5방 군제를 갖추어 지방 통치력을 강화시켰다. 중국 남조와는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그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다. 불교계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5부 율을 갖고 온 겸익을 우대하여 백제적 계율종을 만들고 노리사치계를 통해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시켰다.
참고 자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2003/백제도성의변천과연구상의문제점/서경문화사
국사교과서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