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공과 과
- 최초 등록일
- 2006.10.04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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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의 공적과 과실을 비판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목차
1.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2.흥선대원군의 공
- 안동김씨 무력화
- 강력한 왕권과 건전한 국가
3.흥선대원군의 과
- 경복궁 중건의 폐해
- 국가의 문을 걸어 잠그다
- 정치세력 조정의 실패
- 정권에 대한 집착
4.마치면서
본문내용
확실한 것은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명목상으로나마 이하응도 영조의 혈통에 편입했다는 것(興宣君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열두살에 어머니를, 열일곱살에 아버지를 여의면서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다는 것 정도다. 27세되던 해인 1846년에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으로 관료세계에 입문하고 뒤이어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중략)
대원군의 집권은 그 어떤 제도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대원군은 아무런 직책에도 오르지 않고 정권을 거머쥐었다. 안동김씨 역시 60년동안 정승, 판서급 최고위공직자를 19명이나 배출하였으나 실제로는 직책과 무관하게 광범위한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했고 직책을 아예 가지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다. 제도로 정해진 공권력은 그 한계가 명확하지만 이처럼 제도적 한계를 가지지 않는 권력은 더욱 막강한 것이었다
(중략)
경복궁 완성과 함께 집계된 총건설비는 773만냥. 이중 원납전과 결두전 등의 명목으로 종친과 백성에게 거둬들인 자금이 762만냥으로 확인되었다. 왕실이 부담한 자금은 고작 11만냥에 불과했으니 애시당초에 자금도 없으면서 무리수를 뒀던 대원군의 의중(義衆)을 의심케하는 대목이다. 결국 경복궁 중건은 5년뒤에 다가올 그의 실각(失脚)에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다.
(중략)
현행 국사교과서에서 교육하는 내용과 달리 프랑스군이 얻은 피해는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파견병력 600여명 중에 6명을 잃고 철수하면서(정족산성 전투) 강화도의 막대한 은금괴와 많은 문화유산을 약탈해갔으니 병인양요가 진짜 ‘승리’였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후략)
참고 자료
한국역사연구회,『조선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청년사, 1996
김제방, 『흥선대원군·명성황후』, 지문사, 2003
허동현·박노자, 『우리역사 최전선』, 푸른역사, 2003
한국근현대사연구회,『한국근대개화사상과 개화운동』, 신서원, 1998
이정범·이희근,『강화도의 서양함대와 대원군』, 서강출판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