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모라비안
- 최초 등록일
- 2006.09.18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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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 모라비안교의 기원
모라비안의 선교 출발점은 베르델도르프의 주민 600명이 살던 작은 마을 헤른훗(Herrnhut)이였다. 그곳은 경건하고 선교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던 진젠도르프 백작의 사유지였다. 그는 처음에 모라비안 난민들을 자신의 사유지에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신앙심 깊은 백작의 할머니 헨리터 카테린 폰 게르도르프가 그가 없는 사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유지의 관리인을 통해서 정착할 땅까지 주었던 것이다.
목차
Ⅰ. 모라비안교의 기원
Ⅱ. 핍박받는 모라비안
Ⅲ. 모라비안교의 성장
Ⅳ. 모라비안의 선교활동
Ⅴ. 끊임없는 선교의 열정과 영향
본문내용
1. 모라비안교의 기원
모라비안의 선교 출발점은 베르델도르프의 주민 600명이 살던 작은 마을 헤른훗(Herrnhut)이였다. 그곳은 경건하고 선교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던 진젠도르프 백작의 사유지였다. 그는 처음에 모라비안 난민들을 자신의 사유지에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Hans Wanger, Abraham Durninger & Co. 1747-1939, 2nd ed (Herrnhut:: Abraham Durninger - Stiftung, 1940), p.11.
그러나 신앙심 깊은 백작의 할머니 헨리터 카테린 폰 게르도르프가 그가 없는 사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유지의 관리인을 통해서 정착할 땅까지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모라비안 난민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헤른훗 지역은 훗베르그 기슭에 놓인 늪지로서 경작을 하기에는 전혀 맞지 않는 땅이었다. Gillian Lindt Gollin, Moravians in Two Worlds : A Study of Changing Communities, p.149.
첫 모라비안 난민들은 식탁용 칼 장수들이 었는데 그들은 그 길을 따라서 작업도구를 어깨에 메고 선교의 부르심을 좇아 여러 곳으로 나아갔다. 이 모라비안들은 1415년 종교박해 때 존 후스(John Hus)의 화형을 시발로 일어났던 개혁 의지를 가진 기독교인들 중 공동체 삶을 모색하고 있던 약1458명의 평신도 그룹이 었다. 그들은 삶에서 제기되는 교리적 질문에 대한 해답과 사도적 교회의 회복을 위한 기준을 오직 성경에서 찾기로 결정한 성경중심의 그룹이었다. 초기에는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언약의 형제들(fratres legis Christi) 이라 불렀으며 이후 점차로 형제들의 연합으로 자칭했다(이후 ‘형제단’으로 통칭함) 그후 “형제회”는 보헤미야와 모라비아에서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2. 피박 받는 모라비안
그들은 동방 교회에 어느 정도의 뿌리를 두고 있었고 자주 핍박을 당했는데 특히 30년 전쟁과 종교개혁 기간에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중 일부가 바로 삭스니로 도망하여 진젠도르프 백작의 사유지에 피난처를 마련한 사람들이 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