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정당이 선거에서 패한 이유
- 최초 등록일
- 2006.08.2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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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
목차
1. 4․19혁명
2. 혁신정당의 새로운 전기
3. 7. 29 총선의 패배와 원인
4. 혁신정당의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1. 4․19혁명
"피의 화요일" 이라 불리우는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서울시내는 온통 민주를 외치는 시위대열로 뒤덮혔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이 가해져 꽃다운 젊은 학생과 시민들이 수 없이 희생되었다. 혁명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자,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건 무마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민심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4월 25일, 독재정권의 종말을 결정짓는 시위가 일어났다. 제자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던 대학교수들이 시민과 학생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사태수습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린 이승만 대통령은 11시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마침내 불의에 항거한 민주이념이 승리한 것이다. 새로운 민주시대를 염원하는 환호와 만세소리로 전국이 들끓었다. 4․19혁명의 승리는 희생을 아끼지 않은 이 땅의 모든 이들이 붉은 선혈 위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소중한 산물이었다. 4월 혁명은 12년간 계속된 반민중 독재정권의 몰락을 가져왔음은 물론 혁신계의 정치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주었다.
2. 혁신정당의 새로운 전기
4월 혁명이후 결성된 혁신정당 중에서 7.29 총선에 입후보자를 낸 것은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연맹 등이 있다. 혁신정당 건설 흐름에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사회대중당은 혁신정당의 재건을 목표로 구진보당 간부와 민주혁신당 일부가 참여했다. 1960년 6월 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사회대중당은 서상일, 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하여 창당작업에 착수, 그해 11월 24일 출범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