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문화]등소평체제로의 전환과정
- 최초 등록일
- 2006.07.07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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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부터 덩샤오핑 체제로의 전환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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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사회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사인방은 쟝칭의 당 주석직 획득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했지만, 이것을 저지하려는 반사인방 연합이 구성되었다. 반사인방 연합으로는 화궈펑 등 문화대혁명파 온건그룹, 리센넨 등 저우언라이계의 중간파 관료그룹, 왕전 등 다시 등용된 간부그룹, 예젠잉 등 군 장로 그룹이 있었다. 이들 반사인방 연합에 의해 왕홍위엔과 장춘챠오가 체포당하고 그해 10월 화궈펑이 당 주석이 되었다.
화궈펑은 국무원 총리직에 더해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지만 위태로운 연합 아래서의 형성이었기 때문에 그 기반은 미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모순된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마오쩌둥 노선의 계승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제 건설이었다.
우선 마오쩌둥 노선 계승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화궈펑은 쿠데타로 인해 ‘사인방’이 실각했기 때문에 집권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정식 수속을 밟아 권력을 계승한 것이 아니므로 그 정당성이 취약했다. 화궈펑 집권의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은, 마오쩌둥이 그에게 적어준 ‘你办事 我放心’, 즉 ‘당신이 일을 처리하면 나는 안심한다.’라는 말이었다. 화궈펑에게는 마오쩌둥이 그에게 권력을 넘긴다는 이 말이 집권의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오쩌둥 사상의 가장 충실한 실천자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때문에 ‘两个凡是’라는 방침을 제기했다. ‘两个凡是’란 ‘두개가 무릇(모두) 옳다’라는 뜻이고 이는 즉 ‘첫째, 마오 주석이 내린 결정은 단 하나도 변경해서는 안 된다. 둘째, 마오 주석이 내린 지시는 시종 변함없이 전적에 따른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결국 그는 ‘계급투쟁’ ‘계속혁명’ ‘문화대혁명의 성과’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정체와 그로인한 피해가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재건에도 힘을 쏟아야 했다. 1976년 12월과 그 이듬해 4월 전국회의에서, 화궈펑은 각각 ‘농업은 다자이에서 배우자’, ‘공업은 다칭에서 배우자’라는 말과 함께 “사인방을 타도한 뒤에 전국 인민은 우리나라의 국민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라고 연설을 하고, 공업과 농업의 재건에 매진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계승과 경제재건은 서로 융화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화궈펑은 이 양자를 동시에 받아들여서 추진하려 했다.
이와 함께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에 등장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1976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사인방에 반대해서 박해를 받았던 모든 사람들의 명예를 일률적으로 회복시킬 것”을 통고했다.
참고 자료
아마코 사토시. [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서울: 일조각.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