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지도부의 구성과 성격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동학 농민군 지도부의 구성과정
3. 동학 농민군 지도부의 성장과정과 배경
1)전봉준
2)손화중
3)김개남
4. 동학 농민군 지도부의 성격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1894년 농민봉기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농민봉기의 주체가 누구였고, 또 농민군은 농민봉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향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와 관련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어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농민 봉기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주로 그 주도 계층에 초점을 맞추어 몰락양반설, 빈농설, 요호부민설 등이 제기되어 왔다. 한우근은 농민봉기를 주도한 동학접주들이 대체로 몰락양반의 후예, 즉 잔반에 해당한다고 보고, 이들은 하층 신도인 농민들과 거의 차이가 업는 곤궁한 처지에서 농민봉기의 선두에 섰다고 보았다. 한우근, 《東學과 農民蜂起》, 일조각, 1983, p206,
한편 신용하는 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은 사회신분에서는 ‘양인층’과 ‘노비를 중심으로 하는 천민층’이었고, 사회계급에서는 ‘소작농을 중심으로 한 빈농층’이었다고 보았다. 신용하, 《動學과 甲午農民戰爭硏究》, 일조각, 1993, p114.
정창렬은 농민전쟁의 주체는 ‘농민계층’이었으며, 빈농․,소농은 전쟁의 주력층이었고, 부농은 동조층이었으며, 주도층은 남접의 동학접주들이었다고 보았다. 정창령, 《갑오농민전쟁연구 -전봉준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연세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pp177-190, 1991.
조경달은 농민군 지도자의 성격을 남북접으로 나누어 북접의 경우 부농층, 남접의 경우 소빈농층 이었다고 파악하여, 남접과 북접의 대립을 계급적 기반의 차이로서 설명하였다
2. 동학 농민 지도부의 구성과정
1894년 3월의 제 1차 동학농민전쟁은 동학교단의 안의 이른바 ‘南接’세력이 중심이 되어 주도하였고, 이른바 ‘北接’에 소속되어 있던 동학교단 지도부는 ‘남접’세력의 봉기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섰거나 봉기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이 같은 내용은 『全琫準供招』,『梧下記聞』과 같은 1차 사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서는 먼저 이런 남접과 북접의 용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북접이란 용어는 ‘北道仲主人’에서 유래한 말로서 1880년대 들어 해월을 정점으로 한 동학지도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그 뜻은 수운으로부터 동학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는 일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지 ‘남접’에 상대되는 뜻으로 사용되었거나 북쪽 또는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또한 ‘남접’이란 용어는 북접이란 용어보다는 시기가 비교적 늦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부터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주도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농민전쟁 지도부와 관변 및 유생측, 일본군측에 의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의 구성과정을 살펴보면,
참고 자료
<참고저서>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4, 역사비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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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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