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빅토리아 건축
- 최초 등록일
- 2006.06.22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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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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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경영학 숙제는 여기에 다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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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영국 빅토리아여왕(재위 1837∼1901)시대의 미술양식. 엄밀하게는 특정한 형태에 바탕을 두는 표현양식 이라기보다는 이 시대 미술의 일반적 경향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영국 빅토리아여왕(재위 1837∼1901)시대의 미술양식. 엄밀하게는 특정한 형태에 바탕을 두는 표현양식이라기보다는 이 시대 미술의 일반적 경향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당시 영국은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18세기에 싹튼 중세취미가 깊이 침투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고딕 부흥의 풍조가 지배적이었는데, 과거에 완성된 여러 양식의 무비판적 채용이 절충주의를 낳아 건축과 공예의 양식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834년에 불탄 국회의사당의 고딕양식에 의한 재건(1840)을 들 수 있다. 1849년 W. 버터필드가 설계한 고딕양식의 올세인츠교회는 당시 서유럽 각지에서 유행했던 단순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고전부흥의 단계를 벗어난 독창성을 나타내어, 외벽은 적색과 흑색의 벽돌, 첨두(尖頭)에는 흰돌의 띠장식, 내부는 대리석과 타일을 짜맞춘 참신한 수법을 썼다. 이 설계를 한 그해 J. 러스킨의 저서 《건축의 7등(七燈)》이 간행되어 버터필드의 독창적 양식이 격찬받는 결과를 낳아, 이른바 하이빅토리안 고딕시기가 도래하였다. 1862년 설계경연에 의한 하이드 파크의 앨버트공 기념비, 1868년에 완성된 템스강가의 국회의사당도 이 양식의 대표작이다.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서는 기사 J. 팩스턴이 설계한 철과 유리로 된 수정궁이 세워져, 재래의 돌과 벽돌로 된 건조법과는 다른 구조가 전 유럽의 건축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과거의 양식에 얽매인 건축가들은 이를 건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장려한 이오니아식 원주가 늘어선 파사드에 대해, 안뜰에 철과 유리의 큰 돔을 만든 도서관을 배치한 것처럼 새로운 양식이나 새로운 기술은 오로지 절충식으로 채용되었다. 1870년대에는 명쾌한 평면성과 자연주의를 주장한 W. 모리스 등에 의해 새로운 공예운동이 일어나, 훗날 아르누보의 원천이 되었는데, 그것도 역시 기계를 배제한 중세주의를 규범으로 하는 것이었다.
가장 융성했던 영국사회와 그 지주(支柱)였던 중산계급의 보수적 ·도덕적 경향을 반영시킨 미술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교훈적인 우의화(寓意畵)나 초상화가 그 대부분이며 주요 미술가로는 T.로렌스, E.렌시어, A.스티븐스, G.위츠 등이 있다.
건축은 고전고대와 고딕미술으로의 복귀가 보였으며, 조각과 회화는 로열 아카데미가 온건한 사실주의를 많이 표현하였다.
빅토리아양식 가운데 가장 혁신적이고 후대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라파엘 전파(前派)와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이었다. 빅토리아여왕 재위기간에 미술활동이 왕성한 이유는 산업혁명의 성과와 많은 식민지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인 번영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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