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광해군대 중립외교의 현대적 의미
- 최초 등록일
- 2006.06.20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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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대이 행했던 중립외교에 대한 설명과
그것의 현대적으로 해석 했을 때
내린 판단과 같은 글들이 적혀 있습니다.
목차
▪ 머리말
▪ 조선시대 광해군의 중립외교
- 탁월한 현실 감각을 지닌 국왕 광해군
- 후금에 대한 방어 대책의 마련
- 외교전의 승리 ; 강홍립사건
- 빛 보지 못한 광해군의 중립외교
▪ 중립외교의 현대적 의미
▪ 맺음말
본문내용
▪ 머리말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왕 광해군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신의 친모는 아니지만 어머니격인 인목대비를 폐위 시켰고, 자신의 형제 중 네 명을 처형시킨 패륜의 왕인가? 타고난 총명함 때문에 오히려 빛을 발하지 못한, 어찌 보면 불쌍한 왕인가?
여기서는 광해군의 실리를 중요시한 중립외교에 대해서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중립외교가 가지는 현대적인 재해석을 통해 비판하고, 하지만 그 당시의 광해군이 얼마나 총명하고 현명한 왕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소개해 보겠다.
▪ 조선시대 광해군의 중립외교 - 탁월한 현실 감각을 지닌 국왕 광해군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조선의 역대 국왕들 중에서 가장 긴 세월을 궁궐 밖에서 보낸 임금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궁궐에서 보낸 광해군은 이 후 이현 (현 동대문 근처)에서 종친으로 생활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중에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전쟁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가를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광해군의 안목을 넓고 크게 만들어 주었고, 이는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군사와 외교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광해군은 즉위하는 즉시, 만주족의 침입에 대한 방어책을 준비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했다. 그 중 하나가 만주족의 정보 수집 활동에 대한 대책이다. 광해군이 이러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던 이유는 누르하치 집단의 첩보 활동과 교란 능력이 뛰어 났기 때문이다. 누르하치는 명나라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항상 먼저 간첩을 들여보냈고, 그들을 통해 명나라 측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이로 인해 어떤 경우에는 전투도 하지 않은 채 성을 함락 시켰다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정보전에서도 뛰어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광해군은 이에 대비하고자 조정의 중요한 결정 사항을 조보에 싣지 못하게 하고, 변경 지역에 출몰하는 여진족들을 엄중히 감시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누르하치에게 밀려 곤경에 처한 다른 여진 부족을 정보망으로도 활용하였으며, 여진어 역관 등을 양성하여 첩자로도 활용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