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완용, 진짜 매국노 일까?
- 최초 등록일
- 2006.06.18
- 최종 저작일
- 2006.05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일반적으로 이완용이 매국노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레포트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 것입니다.
높은 점수를 받은 레포트 이니, 많은 참고 바랍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이완용..진짜 매국노 일까?
이완용이 현재 그 정도(?)로 욕먹을 매국노 일까...의문입니다...
역사학자나 사람들의 시각에서는..매국노라고 평가 할수도 있습니다만...
좀더 사실적인...그때 시대상황에서 볼때..진짜 매국노인가?..하는 궁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82년 과거 시험에 응시 병과로 합격하여 검교, 수찬, 해방영군사마 등 주로 군 관련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한 사람이다. 과거에 합격하기 한 해 전인 1881년에 당시 유일무이한 서양식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는 등 서양학문을 학습한 몇 안 되는 관리였던 탓에 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지내면서 나중에 순종이 되는 세자의 측근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벼슬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승승장구, 1887년에는 미국참사관이 되어 미국에 건너가 선진 사회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 외무참의를 역임하였다. 1888년 12월 미국 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1890년 귀국하였다. 1895년에는 오늘날의 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친러파로서 외부대신겸 농상공부대신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에는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후 일본의 사주를 받고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는데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이라는 자객으로부터 저격을 당해 몸이 난자 당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