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발해는 왜 자주 국가인가
- 최초 등록일
- 2006.05.21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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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는 자주국가이다
목차
서론
발해가 자주 국가임을 증명하는 근거 중에서 그 근거를 선택한 이유 & 동기
본론
① 발해가 자주국가라는 대외 관계에서의 증거
② 발해인의 고구려 계승의식
③ 발해국의 무덤 양식과 연호의 사용
결론
발해는 자주국가다.
본문내용
둘째로는, 발해인의 고구려 계승의식입니다.
발해 전 시기를 통틀어 발해인이 스스로 말갈족의 후예라고 한 예는 찾아 볼 수도 없었고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792년 발해가 당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이 사절단의 대표가 가지고 있었던 관직명은 말갈을 관할하는 직책이라는 뜻을 지닌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말갈이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관직명을 통하여 당시 발해 조정이 말갈족에 대하여 어떠한 동족의식도 지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발해 왕실과 그 중심이 말갈족이었다면 발해는 건국 후 백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그러한 관직명을 사용하였다고 상상하기는 조금 힘들다고 보여집니다.
발해인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발해유민들 사이에서도 엿보입니다.
서경 압록부에 근거를 둔 발해유민의 나라인 정안국의 왕이 여진 사신 편에 부쳐 송에 보낸 국서에서 자국의 내력을 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계승의식을 표방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요동지역에 거주하던 발해인 중 유력 가문인 장씨와 왕씨 등도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조영 집단이 말갈족이냐.. 아니면 속말부 유역의 고구려인이었느냐...에 애해 발해 왕실 스스로 고려 국왕이라 칭하는 것으로 보아 후자쪽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실제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고려별종인 발해 왕실이 건국 후 고구려인과 결합하여 그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건설해 나간 것입니다. 설사 대조영 자신이 고구려의 무장이었고 건국 초기부터 보이는 발해 왕실의 귀속의식과 주민구성, 지배구조 등을 살펴 봤을때 대조영은 고구려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이것은 금의 왕실인 완안가의 경우 참고가 되고 있다합니다. 금의 왕실 완안가의 선조는 고려인이었다고 합니다. 금제국을 건설하고서도 그 점은 인정되었었고 아무리 선조가 고려인이었다고는 하나 세력 기반도 여진족이었고 완안가도 여진인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이를 고려인이라 하는 이 없듯이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토인의 성격에 대한 문제에서 그 증거를 뚜렷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