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실증주의 사학자, 이병도
- 최초 등록일
- 2006.05.13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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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주일 넘게 열심히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내용은 상당히 충실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문 결문 참고문헌까지 있어 이대로 제출하여도 무방하며, 표지까지 그냥 두었습니다. 이름만 쓰시면 되요~ ^ ^;; 쨌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차
서문
본문
이병도의 가계와 생애
이병도의 국사관(國史觀)
이병도의 국사연구
고대사연구
고려, 조선시대 연구
저서
국사교본(國史敎本)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
한국사(韓國史)
이병도의 사학사적 위치
결문
참고자료
본문내용
이병도의 가계와 생애
두계 이병도는 94세의 비범한 장수기록을 세우면서 근 70년간의 연구 활동을 통해 해방 전후 시기의 우리나라 역사학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조선시대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이던 우봉 이씨의 후예로서 대한제국 성립 전 해에 태어난 그는 양반자체가 흔히 그러하듯이 6세부터 훈장을 가정에 초빙하여 한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직계 중에는 중종 때 현량과(賢良科)로 입사한 이승건, 인조 때 김장생, 문인이던 이유겸, 현종 때 송시열 문인으로서 이조판서에 오른 이익 등 명류가 있다. 그러나 이익의 손자 이관이 숙종 때 신임사화(辛壬士禍, 노론 실각)를 계기로 하여 충청도 보령으로 낙향하면서 그 후손들은 200여 년간 지방의 한사로 지냈으며, 그 사이 거처를 보령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이병도의 직계조상이 다시 관계에 오른 것은 부친 이봉구가 무과에 합격하여 충청도 수사(水使)가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을사조약(1905)과 정미조약(1907)으로 국운이 기울어지고 지방에는 활빈당이 지주를 습격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07년 부친은 가족을 거느리고 서우로 이사 온 후 그해 타계했다. 그의 나이 12세 때 일이다.
5형제의 막내(재취 부인의 후생)로 태어난 이병도는 서울에 온 후 비로소 신학문에 눈떠 보광학교와 불교고등학교(일인(日人) 경영)를 다니고, 국치(國恥) 직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학교에 입학한 것은 당시 붐을 이루고 있던 일어를 공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보성전문을 졸업한 그는 가족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예과를 거쳐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는데 일인학자 요시다(吉田東伍)의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에 자극을 받아 한국사를 전공으로 택하였으며,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 강사 쯔다(津田左右吉)로부터 개인적인 지도를 받아 문헌고증학의 기초를 다졌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그는 중앙학교에 재직하면서 김억, 남궁벽, 염상섭 등 일본유학생 출신 문인들과 더불어 《폐허》 창간(1920)에 참여했으나, 사학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께노우찌의 권유와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촉탁을 맡으면서 학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그의 나이 30세였는데 해방 직전까지 그 일을 20년간 맡으면서 규장각(奎章閣)도서를 열람할 기회를 가졌다. 이것은 그가 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 자료
조동걸, {현대한국사학사}, 나남출판, 1998.
조동걸 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1994.
신형식, {한국전통문화와 역사의식}, 상지출판사, 2001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23.